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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덩어리

    어릴 적부터, 나는 멈춰 있는 세상을 본 적이 없었다. 벽은 쉼 없이 꿈틀거렸고, 천장에는 길게 이어진 검은 덩어리가 내려왔다 올라갔다를 반복했다. 온 세상은 검은 것으로 도배되어 있었고, 운이 좋아야만 간신히 그 사이로 사물의 원형을 볼 수 있었다. “색맹인 것 같습니다.” 의사가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나는 색깔을 볼 수 없는 게 아니었다. 그저 세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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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과 시간

    본작은 연대기적 구성을 따르고 있다.시간순으로 사건이 발생하고, 그 결과와 여파를 착실히 묘사하는 형태로 작중 전개를 이끌어 간다. 그에 반해 시계열은 주요하게 다뤄지지 않고 있다.이는 시간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구체적인 시기를 묘사하는데 들이는 품이 적다는 의미이다. 이유는 여럿 있으나, 미관상의 이유가 가장 크다.일일이 날짜를 나열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설명문에 아라비아 숫자가 자주 나오게 되는데,이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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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나 外

    누나가 거북을 데려왔다.죽지 않으니 내게 알맞다고 한다.누나는 거북보다 일찍 죽었다. ㅡ 진동하는 별의 소리에 놀라 깨었다.울음, 웃는 건 확실히 아니고.다시 들으니 역시 우는 게 맞았다. ㅡ 어깨가 들썩거린다.심장이 뛸 때마다 그랬다.고동과 고통은 닮았다. ㅡ 개미는 시체를 먹고 산다.누가 죽어야 개미가 사는 것이다.우리 할머니도 반쯤은 개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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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나

    어제 누나가 죽었다. 자살이었다. 알게 된 것은 오늘 새벽이었지만, 정확히 언제쯤 죽었는지 알지 못했다. 경찰관도, 부검의도 알려주지 않았다.  가족이 죽었다. 자살이었다. 알게 된 것은 어제였지만, 정확히 언제쯤 죽었는지 알지 못했다. 말하지 않은 건 실수인 듯했지만 물어보면 괜히 상대를 지적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하지 않았다. 그건 내 잘못이었다. 상주로서 수 차례 물어보는 질문 중 가장 곤란한 것이 언제 가족분이 별세했는지였다. 그때마다 나는 아홉 시에 죽었다, 열두시에 죽었다 등등 되는 대로 대답해서, 가족은 온종일 자살하는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지금은 관 속에 있을 가족의 모습을 영정으로 엿볼 때마다 질투가 치솟았다. 아마 먼저 죽는 건 내가 될 줄 알았는데, 선수를 빼앗긴 것이다. 그 때문에 죽은 사람은 편하게 누워 있는 동안, 나는 혼자서 복잡한 장례 절차나 행정 업무를 다 도맡아야 했다. 소리를 질러도 평소처럼 고함으로 돌아오거나 하지 않아서 나만 멀뚱히 바보처럼 보이게 되었다. 별로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이상하게도 부고를 들었을 때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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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무에서 머리가 자란 날 外

    나무에서 머리가 자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떡잎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영락없이 머리다. 태아처럼 투명하고 만지면 푸욱 꺼지는 부드러운 머리였는데, 점점 커지더니 머리카락이 자라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은 검은색이었는데, 머리카락이 까슬 거리는 직모라 쓰다듬으면 찔리고 말았다. 찔린 자리에서 피가 나길래 만지는 것은 그만뒀다. 눈꺼풀은 있었는데 언제나 감고 있어서 눈알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열어젖힌다면 확인은 할 수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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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아 外

    고아는 어미를 찾고 있다. 슬픈 눈을 한 고아는 주위를 둘러보며 제 어미를 찾고 있다. 간신히 기억하고 있는 어미의 얼굴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조금도 어미를 닮지 않은 낯선 어른이 다가온다. 고아는 겁먹은 표정으로 어른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죄송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이산가족 상봉 신청 조건이 되지 않습니다. 고아는 슬픈 눈으로 그제서야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ㅡ 손톱이 좀처럼 자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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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독

    작업이 장기화되면 어느 순간부터 뭐가 흥미로운 전개인지 잊게 되는 경우가 있다. 스스로는 길을 잃었다고 표현하는 순간이다. 이럴 때는 도무지 객관화가 되질 않는다. 어떤 내용을 쓰고 있고, 또 어떤 전개가 필요한지도 모른 채, 각 편의 의의만을 생각하게 된다. 이때마다 감각을 되찾고, 제대로 된 방향을 찾기 위해 며칠씩 유예를 들이곤 한다. 하지만 이때마다 실은 상담을 하면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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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n dTigerna, saoi saoi.”

    “an dTigerna, saoi saoi.”(Our lord, sage of sage.) 이 한 문장을 완성하기 위해, 사료가 턱없이 부족한 게일어 문법을 전부 공부할 수는 없는 통에, 창작자로서 부끄러운 일이지만 용례에 의존하여 작성하였다. 그러니 완벽한 문장은 아닐지 몰라도, 부디 양해를 구하며 이하 참고한 문법 자료 밑 용례를 정리하여 첨부한다. de : 일반적인 의미에서 of다만, Lord of lord를 Tiarna tiarna로 표기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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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재 중단 후기

    <좀비가 한 명밖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는 2019년 브릿G 좀비 문학 장편 소설 부문에 제출하기 위해서, 대략 2주 정도 동안 준비했던 장편 소설이다. 당시에는 거의 일일연재의 추세로 연재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중학교 이후로 처음 써본 장편 소설이라서 그럴까, 아무래도 사이트 내에서 반응이 좋지 않아서 수상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연재를 멈췄었다. (최신화는커녕 몇 편간 조회수 0회!)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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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하나 – 외래종(1)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소원이 이뤄지면, 의외로 무섭다는 생각이 먼저 들더라고요. 제 경우엔 유진이가 죽었을 때 그랬어요. 틀림없이 기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라고요. 심지어 ‘내가 죽였나?’ 같은 이상한 망상까지 떠올랐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제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야기를 듣고 나면, 아마 평범하게 납득하실 거예요. 제가 그 아이가 죽길 바란 게 그리 이상한 게 아니란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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