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랜 벗을 소개하며

    나와 죽음의 관계는 퍽 문학적이다.

    내가 처음으로 죽음을 직시한 것은, 어릴 적, 잠자리를 풀잎에 올려두었던 밤이다. 내 손에서 살아 있던 잠자리는 바닥에 떨어져, 그대로 개미에게 뜯어 먹혔고, 나로 하여금 유구한 죽음(또는 개미)과의 투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지탱하는 데 무수한 죽음이 필요한 것에 비해, 그 잠자리는 고작 한 마리의 죽음으로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것이다.)

    조모께서는 침대에서 떨어져서 돌아가시게 되었다. 원래도 섬망을 앓고 계셨으며, 당뇨로 주기적인 투석이 필요하신 분이셨다. 그런데 바닥에 떨어지며 골반 뼈가 부러지는 바람에, 1년(어쩌면 2년) 정도 여러 보호소를 전전하다 돌아가시게 되었다. 보호소에서 학대의 흔적을 발견하기도 했지만, 앞서 말했듯이 섬망이 있으셨고, 본래도 거동이 힘드셨기에, 모시는 것은 어렵다는 이유로 모두가 쉬쉬하였다.

    조모께서 돌아가셨을 때, 나는 참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였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상주를 맡게 되는 사흘 내내 울면서도, 참 다행이다, 하고 거듭 생각하였다.

    이후, 나는 남은 조부께서 적적하시지 않게끔 매일 전화하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조부께서 돌아가셨다. 낙상사였다. 돌바닥에 머리부터 넘어지는 바람에, 그대로 뇌사 상태가 되어 돌아가시고 말았다. CCTV 영상도 있었고, 볼 수도 있었지만, 보지 않았다. 친척들 모두 보았지만, 나는 보지 않았다.

    일주일 만에 나는 두 번째 상주를 맡게 되었다. 비록 있지도 않은 유산을 탐내며, 그간 의절하고 있던 호로 새끼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조모, 조부께서 울면서 손녀 얼굴을 보고 싶다고 해도, 끝끝내 얼굴 한 번 보여주지 않았으면서, 조부의 장례식장에서는 웃으면서 친구들을 맞이했다.

    그 이후로 나는 삶과 꽤 소원해졌다. 하지만 오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러한 죽음과의 관계성은, 나만의 특수성이라 보기 어렵다. 죽음이란 본래 문학적이라, 어떤 형태의 만남도 아주 시적으로 꾸며주곤 한다. 나와 죽음의 관계는 냉정하게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닌 셈이다.

    오래 전부터 나는 내 죽음을 정해두었다. 목을 메거나, 투신하거나. 이것이 내가 죽음에 대항하는 유일한 수법이고, 지금까지는 꽤 잘하고 있다.

  • ,

    2020년

    여러분은 왜 태어났습니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 키보드 자판의 ALT키가 사라졌습니다. 쏟은 커피를 닦는다고 하여 뽑아놓은 게 바닥에 떨어지더니 그대로 사라지고 만 것이지요. 제가 작가가 되었다며 큰맘 먹고 마련한 30만원짜리 키보드는 졸지에 한푼 값어치도 없는 결함품이 되었습니다.

    제 키보드에는 자판 버튼이 104개 있는데, 단 하나 빠진 것으로 그렇게 가치를 잃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인간으로 한없이 결함되어 있는 저는 얼마나 가치 없는 존재일까요.

    생식과 번식을 혐오하는 저는 생물로서도 결함되었고, 유희를 즐기면서도 죄악감을 품는 저는 인간으로서도 결함되어 있습니다. 누구도 제가 태어나는 걸 바라지 않았고, 인간 사회에 있어서는 해밖에 끼친 적이 없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ALT키가 사라진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책상 아래로 떨어져서 갈 곳도 없는 그것이 어디에도 없는 것이야말로 결함은 필연이라는 의미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간혹 저는 파멸적인 망상을 품습니다. 제 두 손으로 사랑하는 생물을 안아서 창문 밖으로 떨어트리는 겁니다. 그러면 절 믿고 의지하던 그것은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무참하게 내장을 터트리며 핏덩이가 되겠죠. 어느 때는 제가 사랑해 마지 않는 장서에 불을 붙이는 상상을 합니다. 집에는 습기가 적고 먼지가 많으니 잘 탈 것입니다.

    저는 사후 세계를 믿지도 않고, 어떤 절대자의 존재도 믿지 않지만, 하느님께 제 팔과 다리를 잘라달라고 빌곤 합니다. 그래서 제가 자의로 무엇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 달라고 간절히 비는 것입니다.

    저는 이 글을 누구도 보지 않을 것을 압니다. 그럼에도 문장은 여러분으로 시작하며, 누군가 이 글을 봐주길 애타게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의미는 저도 잘 알지 못합니다. 해답을 사유할 만큼 대단한 철학적 소양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렇게 뭐든지 되다 만 존재입니다.

  • ,

    수필 – 나는 결국 죽은 것밖에 사랑할 수 없다.

    나는 망망대해를 건너고 있다

    일생 나는 불편을 느끼면서도 도통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모르다가, 어젯밤 침대에 누워 별과 창문의 노래를 듣다가 간신히 알게 되었다. 내게는 생명의 자격이 없다. 나는 생식을 혐오한다. 다른 생명을 먹어 양분 삼는 것은 물론이며, 다시 깨어날 수 있을지 불안한 내 의식과 이성을 맡기고 잠들고 싶지도 않으며, 성애는 혐오의 절정이다.

    그리고 나와 같이 자격 없는 자는 결코 창작해서는 안되었다. 진정 삶을 노래할 수도 없을 뿐더러, 설령 그러하거든 모두 거짓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창작이란 도대체 무엇이냐, 나는 오히려 영원한 허무가 좋단 말이다.

    나는 지옥의 한복판에 있다. 이곳은 생명으로 가득하여 나는 필히 살생할 수밖에 없고, 또 그것이 사그라드는 것을 관망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지옥의 특성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특성을 가진 곳이 지옥뿐이 또 있으리오.

  • ,

    고독

    작업이 장기화되면 어느 순간부터 뭐가 흥미로운 전개인지 잊게 되는 경우가 있다.

    스스로는 길을 잃었다고 표현하는 순간이다.

    이럴 때는 도무지 객관화가 되질 않는다.

    어떤 내용을 쓰고 있고, 또 어떤 전개가 필요한지도 모른 채, 각 편의 의의만을 생각하게 된다.

    이때마다 감각을 되찾고, 제대로 된 방향을 찾기 위해 며칠씩 유예를 들이곤 한다.

    하지만 이때마다 실은 상담을 하면 더 간편하겠다는 생각을 왕왕 한다.

    나 자신의 철학에 위배되는 일이지만, 실제로 그 편이 글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누구에게도 물을 수 없다.

    우선은 나는 내 글을 읽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탓이다.

    그야 많은 사람이 읽지 않고, 내용 또한 기괴하니 감내할 일이다.

    그렇다고 해도, 때때로 고독에 파묻히는 심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도대체 적자를 내며, 실체 없는 독자를 상대로, 몸을 해쳐가며 이런 작업을 계속하는 이유가 뭔가 하고 말이다.

    자기만족이란 자신을 탐구하기 귀찮은 자가 떠올릴 만한 게으른 표현이다.

    우선 이유를 찾자면, 나는 본편에서 내가 살아갈 의미를 찾고 있다.

    집필을 멈춘다면 죽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가장 주요한 이유일 터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나 생에 미련이 많던가?

    그리 생각하면, 내가 이토록 괴로워 하는 이유가 뭔지 또 미궁에 빠진다.

    개인. 개인. 개인. 참 모르겠다. 머리가 어지럽다. 졸린 걸까?

  • ,

    웹소설의 종교적 색채

    과거 모든 문명권에서 나타난 종교의 원형은 늘 유사성을 띈다.

    하나는 체계화된 도덕의 역할이다. 통치자, 혹은 부모 세대는 종교의 계율을 통해 선한 행위를 가르치려 했다.
    대다수의 율법에서 살인, 절도, 간통 등 범죄를 나열하며 금지하는 문구는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또 하나의 역할은 인간 본연의 두려움을 억제하는 것이다.
    죽음 말이다. 사후세계는 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요소로서 죽음이 끝이 아님을 거듭 강조한다.

    종교의 두 성격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게 된다.
    현재(현세)에서 어떤 행위(선행)을 하면 사후에 보상 받는다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세계관을 띄기 때문이다.

    즉, 종교는 법치주의가 태동하기 이전부터 도덕을 통해 인류 문명을 제어해온 것이다.

    현대에 종교가 세속화되며, 많은 이의 그저 친근한 이웃으로 남은 것에는 이러한 요소가 크게 작용했음이 분명하다.
    유물론이 지배 사상으로 자리 잡고, 수많은 종교의 거짓말이 타파된 지금, 이제 뇌에서 사고가 이뤄진다는 건 일반 상식이다.
    아무리 사후세계를 약속한다 해도, 모든 인간은 내심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다는 걸 이해하고 마는 것이다.
    즉, 보상에 대한 구속력은 약해졌고, 종교는 이미 통제자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많은 종교는 이를 이해하고, 자신의 역할을 그저 선한 조언자로 바꾸게 된 것이다.

    또한 헌신적인 신자가 줄어든 것도 같은 방식으로 설명 가능하다.

    그렇다고 죽음에 대한 공포가 줄었을까? 필시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죽으면 끝이라는 놀랍도록 시시한 깨달음을 강요하는 창작자가 팽배한 이 시대에, 많은 사람은 죽음을 더욱 일상적으로 자주 인지하고 상상하게 된다.

    많은 사람은 여전히 종교의 사후관에 의존하나, 청년 세대의 개인, 비판, 허무주의적 성격은 그런 풍조를 거부한다.
    한편, 나는 웹소설과 종교의 사후관이 많은 면에서 비슷하다는 걸 깨달았다. 공교롭게도 웹소설은 또한 이런 청년 세대가 다수 함유하는 문화이기도 했다.

    이른바 회빙환이라고 부르는 인기 웹소설의 삼요소는 사후관의 일종이다.

    죽었을 때, 과거로 돌아가서 과거의 실패를 바로 잡고, 더 나은 인생을 반복할 수 있다는 회귀.
    또 다른 인물의 몸을 빌려서 여기보다는 더 나은 곳에서 좋은 인생을 살 수 있다는 빙의.
    불교의 용어에서 따왔듯이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의 환생.

    모두의 공통점은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니며, 사후에는 현재보다 나은 삶이 이어질 것이란 내용이다.
    이러한 특성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소설에서도 유행하는 서사로, 그 시작점이 어디였던 간에 국적을 불문하고 매력적이라 느끼는 구조임은 틀림없다. 심지어는 소설을 벗어나 만화, 드라마, 영화 등에서도 이런 플롯이 확산하고 있음은 명백하다.

    종합했을 때, 웹소설의 인기는 그저 유흥 목적에만 있진 않을 것이다.

    누구도 인정하지 않겠지만, 어둡고 괴로운 현실 속에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웹소설은 이미 불안한 청년들을 위한 성경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