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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년 5월 24일 – 피츠제럴드도 아니고

    피츠제럴드는 돈을 위해 글을 썼다.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그는 할리우드에서 글을 썼다. 그리고 아주 많은 작품을, 단편들을 돈을 받고 써냈다. 이 때문에, 피츠제럴드는 항상 평가절하당했다. 하지만 사실은 어떤가? 문학이 돈과 분리되었던 시대가 진정 있기는 한가? 실로 기이하다. 자기완결을 위해 일생을 바친 극소수의 기인이 만들어낸 이미지에, 문학의 실체는 완전히 부정당해, 질식되어 소멸하고 만 것이다. 심지어 이 허무맹랑한 신기루에 홀려, 지금 같은 시대에도 수많은 젊음이 비실존하는 문학을 향해 허망한 투신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운 좋게도 나는 그 역학을 벗어났다. 해답 없는 탐미주의와 자아실현의 몽상에서 빠져나와, 오직 돈을 위한 글을 쓰게 된 것이다. 이는 내 경력이 일천하여 어떤 허물을 쓰는 데도 거부감이 없었기 때문이고(꽤 나중에 알았지만, 이것은 꽤 주요한 소질이었다.), 또 천만다행하게도 사람들이 사주는 글을 쓰는 법을 익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가장 주된 이유를 말하자면, 내게 아주 많은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그래서 지금은 어떠한가? 내 것이 아닌 채무는 끝났고, 나는 본디 그런 거금을 원치 않는다. (이 점에 한해서는 피츠제럴드보다 운이 좋다고 할 수 있겠지.) 긴 세월 억눌렸던 자아는 다시금 실존하지 않는 신기루(자아 실현, 작품, 문학)를 향해 나아갈 것을 호소한다. 밤마다 문호들(헤밍웨이, 도스토프옙스키, 미시마 유키오)의 허깨비가 내게 다가와 손을 내민다. 완전히 미친 짓이다. 하물며 나는 이제 젊지도, 진정 열의를 담아낼 글(신기루)을 쓸 수도 없을 뿐더러, 쓰길 원하는 지조차 알지 못한다.

    피츠제럴드는 돈을 위해 글을 썼다.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어찌 그랬을까.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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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루 아카이브

    텍스트라는 무대 위에는 각광이 없다. 텍스트 뒤에 능동적인 누군가(작가)가 있고, 그 앞에 수동적인 누군가(독자)가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주체와 객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어느 극단적인 작가(Angelus Silesius)가 묘사한 ‘구분할 수 없는 시선’과 같다: “내가 하느님을 보는 눈은, 하느님이 나를 보는 눈과 같다.”

    – 텍스트의 즐거움, 롤랑 바르트 저 中 –

    그간 집필 활동을 하며 견지해 온 입장이 있습니다. 독자는 작가를 알아서는 안 되고, 알게 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자명합니다. 제가 쓰고 있는 글은, 저라는 인물의 사상이나 이념을 풀어내는 수단이 아니라,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즐거움에 조금이라도 악영향을 줄 만한 것이라면, 배제하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지극히 상식적이고, 논리적인 대응인 셈입니다.

    한편, 그와 상반된 정서가 제 안에 존재합니다. 저는 이것을 책임감이라 부르고 있지만, 실제로는 추한 과시 욕구, 인정 욕구의 발로인지도 모릅니다. (프로이트라면 틀림없이 성기와 유년기의 왜곡된 트라우마 따위로 비유했을 법한 그런 것)

    어쨌거나, 저는 작가는 독자로부터 숨어야 한다 믿는 동시에, 쓰고 있는 글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모순을 믿습니다.

    이 상반된 견해를 소화하기 위해 긴 세월을 고심했지만, 여전히 저는 답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다만, 제가 답변을 유예하는 동안, 제가 집필 자체를 멈췄다고 생각하고 계신 독자분들이 많다는 것도 보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들을 위해, 저는 위에서 말한 책임을 지고자 합니다. 일단, 저는 창작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다만, 그 형태가 모두가 기대하던 형태는 아닐 것입니다. – 적어도 한동안은 그럴 것입니다.

    저는 잠시 쉼표를 찍어두고자 합니다. 이런 소극적인 형태의 답변이 모두에게, 아니, 단 한 명이라도 만족할 답변이 될지는 몰라도.

    과연 바람이 불까요? 저는 그랬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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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리하고 싶은 내용

    설명과 유치

    인물의 말버릇

    소설 전개에 따라, 상징하는 세계가 좁아지는 과정
    (국가 -> 규범 -> 관계 -> 자아 -> 부모)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

    대부분 내 안에서도 휘발되어 사라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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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년 5월 16일 – 현재진행형

    연재 당시의 일기를 정리하며 깨달은 바가 있다.

    당시에 하려 했던 것, 혹은 하게 된 것들의 대부분이 여전히 진행 중에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금각사를 아직 다 읽지 않았다. 집필 프로그램 역시 워드로 전환하지 못했다. 아직도 밤잠을 설치며, 키보드에 커피를 쏟는다.

    이토록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나는 조금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나는 10년 후에도 키보드에 커피를 쏟고 있을 것이고, 20년 후에도 그럴 것이다.

    이렇듯이 사람은 (혹은 나만은) 스스로 맺음 짓지 못한다. 이것이 죽음이 필요한 절실한 이유이다. 삶에는 아름다운 방점이 필요하다. 아무리 추하고 허무하더라도, 방점은 그 자체만으로 아름답다.

  • 방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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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글 작업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완결) 단편 기타 유서 일기 수필 무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