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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년 7월 23일 – 증발

    증발, 한때 나는 이 단어를 대단히 무서워했지만, 지금은 거의 홀려 있다.
    이는 공포와 선망이 한없이 다가서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늘 내가 이 아름다운 현상에 심취해 있다가도, 막상 내일이 닥치면 죽음을 앞둔 노인처럼 두려워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지금 내가 증발을 선망하는 것은 부정할 도리가 없다.

    완전한 소멸. 완전한 상실. 완전한 망각.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그렇게 보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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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년 6월 17일 – 퇴근

    힘들어.

    이상하다. 회사 다니면 좀 더 안정적이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게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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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년 6월 13일 – 그저 불쌍히

    나의 재능은 그리 대단치 않고,
    나의 비극은 그리 극적이지 않고,
    나의 고통은 그리 큰 것이 않음을,

    늘 염두하고, 겸허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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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년 6월 4일 – 시끄러워

    심장 소리가 시끄럽다는 사실을 너무 일찍 깨달은 탓에 나는 영구적인 불면증을 겪게 되었다.
    그리고 선풍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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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년 6월 3일 – 한 근에 2100원

    누군가 보는 일기를 쓴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기분이다.
    보여주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고, 숨길 방법이야 많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이는 푸주한의 사명이다.
    일찍이 나는 나 자신의 토막내어 시장에 전시해 두지 않았던가.

    비록 섬세하지는 않더라도 단호하게, 일말의 동정심도 없이 기계적인 동작을 수행해, 248조각으로 등분하여 지금도 자랑스레 고리에 걸어 전시해 두고 있지 않던가.
    신선한 고기는 푸주한의 자부심이고, 팔리는 것은 기쁨이어야 한다.

    때문에, 나는 속살을 드러내는 데에 거부감을 품어서는 안될 노릇이다.
    (거부감은 기쁨에 상반된 감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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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년 6월 2일 – 생각을 말하는 것은 공격적이다.

    사회에서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는 것보다 공격적인 행위가 있을까?
    (폭력이나 욕설 등의 반사회적이지 않은 행위에 한하여)

    이는 나만의 생각도 아니고, 또한 참신하거나 새로운 관점도 아니다.
    작은 사회에서는 가십(뒷담)과 같은 형태로 나타나고, 큰 사회에서는 정치의 형태로 나타난다. 둘 모두 여지없이 폭력적이라는 사실에 반박할 사람은 드물 테지.

    하지만 이것은 사회에 국한된다. 밀란 쿤데라는, 모든 도덕적 판단을 중지하는 것이야말로 소설의 도덕이라 주장했다. 문학의 세계에서는 윤리적 자태는 의미가 없기에, 한없이 창발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즉, 문학을 하며, 사회를 살아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도덕적으로도 옳지 못하며, 성립할 수도 없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고 또.

    버들나무의 잎사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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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년 5월 24일 – 피츠제럴드도 아니고

    피츠제럴드는 돈을 위해 글을 썼다.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그는 할리우드에서 글을 썼다. 그리고 아주 많은 작품을, 단편들을 돈을 받고 써냈다. 이 때문에, 피츠제럴드는 항상 평가절하당했다. 하지만 사실은 어떤가? 문학이 돈과 분리되었던 시대가 진정 있기는 한가? 실로 기이하다. 자기완결을 위해 일생을 바친 극소수의 기인이 만들어낸 이미지에, 문학의 실체는 완전히 부정당해, 질식되어 소멸하고 만 것이다. 심지어 이 허무맹랑한 신기루에 홀려, 지금 같은 시대에도 수많은 젊음이 비실존하는 문학을 향해 허망한 투신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운 좋게도 나는 그 역학을 벗어났다. 해답 없는 탐미주의와 자아실현의 몽상에서 빠져나와, 오직 돈을 위한 글을 쓰게 된 것이다. 이는 내 경력이 일천하여 어떤 허물을 쓰는 데도 거부감이 없었기 때문이고(꽤 나중에 알았지만, 이것은 꽤 주요한 소질이었다.), 또 천만다행하게도 사람들이 사주는 글을 쓰는 법을 익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가장 주된 이유를 말하자면, 내게 아주 많은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그래서 지금은 어떠한가? 내 것이 아닌 채무는 끝났고, 나는 본디 그런 거금을 원치 않는다. (이 점에 한해서는 피츠제럴드보다 운이 좋다고 할 수 있겠지.) 긴 세월 억눌렸던 자아는 다시금 실존하지 않는 신기루(자아 실현, 작품, 문학)를 향해 나아갈 것을 호소한다. 밤마다 문호들(헤밍웨이, 도스토프옙스키, 미시마 유키오)의 허깨비가 내게 다가와 손을 내민다. 완전히 미친 짓이다. 하물며 나는 이제 젊지도, 진정 열의를 담아낼 글(신기루)을 쓸 수도 없을 뿐더러, 쓰길 원하는 지조차 알지 못한다.

    피츠제럴드는 돈을 위해 글을 썼다.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어찌 그랬을까.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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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년 5월 16일 – 현재진행형

    연재 당시의 일기를 정리하며 깨달은 바가 있다.

    당시에 하려 했던 것, 혹은 하게 된 것들의 대부분이 여전히 진행 중에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금각사를 아직 다 읽지 않았다. 집필 프로그램 역시 워드로 전환하지 못했다. 아직도 밤잠을 설치며, 키보드에 커피를 쏟는다.

    이토록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나는 조금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나는 10년 후에도 키보드에 커피를 쏟고 있을 것이고, 20년 후에도 그럴 것이다.

    이렇듯이 사람은 (혹은 나만은) 스스로 맺음 짓지 못한다. 이것이 죽음이 필요한 절실한 이유이다. 삶에는 아름다운 방점이 필요하다. 아무리 추하고 허무하더라도, 방점은 그 자체만으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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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년 4월 21일 – 6년의 침묵과 고도화된 피로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문인 중에서도 기이한 경력을 가진 폴 발레리가 집필과 단절하여 지낸 세월은 거의 20년에 이른다. 나는 동년의 작가들이 금자탑을 쌓는 동안, 삶과 재능을 한없이 허비했다.

    그렇기에 폴 발레리인 것이다. 오직 그만이, 나의 저열한 열패감과 6년이라는 경력 단절을 위로해 준다. 하지만, 내가 폴 발레리인가? 최인훈도, 피츠제럴드도 되지 못한 내가.

    최근, 나는 고도화된 피로를 느낀다. 이렇게 말하면 꽤 훌륭한 것처럼 들리지만, 그 본질은 언어화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장을 매개로 다루는 우리 같은 족속들에게, 언어화가 어렵다는 것은 실로 나태하고, 별 볼 일 없는 것이다.
    (혹은 그만큼 가치가 없거나)

    어쨌거나, 나는 전에 없이 고도화되어 있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세월이 얼마나 무자비할 수 있는지 보았다.
    20년의 시간이 antihoney에게서 무엇을 빼앗았는지 보았다.

    바람이 분다. 그렇지만, 살아야 할 이유는 어디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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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4월 28일 – 취미

    취미가 있는 사람은 멋있다.

    장기적으로 열정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운,

    보온성이 선천적으로 결여된 내게는 부러운 일이다.

    독서와 음악 감상이 취미가 되기엔 너무 보편적인 사회이니,

    뭔가, 어, 모르겠다.

    유화나 피아노를 다시 하고 싶은데,

    시간이 필요한 일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