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과 유치
인물의 말버릇
소설 전개에 따라, 상징하는 세계가 좁아지는 과정
(국가 -> 규범 -> 관계 -> 자아 -> 부모)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
대부분 내 안에서도 휘발되어 사라졌지만….
설명과 유치
인물의 말버릇
소설 전개에 따라, 상징하는 세계가 좁아지는 과정
(국가 -> 규범 -> 관계 -> 자아 -> 부모)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
대부분 내 안에서도 휘발되어 사라졌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름에 힘이 있다는 믿음은 보편적이다.
심지어 그 믿음은 이름이 운명을 정한다는 미신으로 확산하기도 한다.
그 때문에 얼마 전까지 국내에선 작명소에서 비싼 돈을 내어가며 아이 이름을 짓는 것마저 흔한 일이었다.
나는 그토록 이름이 가진 의미에 심취하진 않았지만, 작가로서 자식 같은 등장인물들에게 저마다 의미 있는 이름을 붙여주는 걸 즐긴다. 인물이 가진 상징성을 은연 중에 드러내기도 하고, 어디서 모티브를 얻은 인물인지 등등을 표현하는 방식의 하나로써 말이다.
전에도 이런 사례를 하나 조심스럽게 공개한 적이 있었다.
몇몇 이름을 통해서 H. G. 웰즈에 대한 헌사를 나타내려다 실패한 경우 말이다.
(참고 : rottenlove.tistory.com/33 )
아무튼 그런 사례 중에 일부를 재미 삼아, 기억나는 대로 몇 적어보려고 한다.
1. 베데스다
<95. 런던묵시록> (전 <95. 런던묵시록 / 종말의 날>) 편에 등장한 단역이다.
그리고 이 글을 작성하는 데에 가장 큰 동기 부여를 한 인물이기도 하다.
사실 이 베데스다라는 명칭은 이름으로 쓸 수 없다.
이는 ‘요한복음’ 5장에서 나오는 예루살렘 인근의 한 호수의 이름, 즉, 지명이다.
또한 그 명칭 또한 히브리어인지라, 영어권의 인명으로 등장한 것부터가 대단히 노골적인 행위라 할 수 있다.
나는 그만큼 이 인물이 가진 상징성을 강하게 강조하려 했다.
요한복음 5장은 주 예수께서 일으킨 기적이 묘사되는 부분인데, 내용은 이렇다.
베데스다 호수 근처를 들른 예수는 수많은 병자가 못 주변에 누운 것을 발견한다.
거기에는 심지어 38년 동안 누워 있는 병자가 있었는데, 그가 말하기론,
“이 호수에는 가끔 천사가 내려오는데, 그때 호수에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는 모든 병이 낫는다. 하지만 내 다리가 불편한데 아무도 날 호수에 밀어주질 않아서 낫질 못했다.”
예수는 걸어가라는 말 한 마디로 그를 낫게 하였다.
여기서 38년 된 병자는 성경에서 드물게 예수의 은혜를 받으면서, 동시에 죄인의 속성을 지닌 인물이다.
(*좀 더 원론적으로 따지면 성경의 모든 인물이 죄인인 동시에, 예수의 은혜를 받긴 하지만, 그런 신학적인 의미는 제하고 말이다.)
그가 병에 걸린 건 제탓도 아니고, 남에게 피해를 준 것도 없는 불쌍한 인물인데도 죄인인 것이다.
38년간, 병을 낳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그저 누군가 밀어주기만 기다린 것 자체가 죄였다.
작중 베데스다는 처한 상황을 흘러가는 대로 보냈다.
누가 보아도 최악으로 치닿는 상황 속에서 아무 노력이나 판단도 없이
그러고도 그는 천국에 닿길 원하고, 자신이 선한 신자이길 바랐다.
그런 그에게 베데스다란 이름은 더없이 적합한 것이다.
2. 빈센트 흐라발
나는 문학에 있어서 다소 거만해지곤 한다.
어느 감동적인 글귀를 보더라도 머릿속으로는 금방 그 문장을 교정하며, 이렇게 쓰는 것이 더 나았을텐데 하며 작가에게 시비를 거는 것이다.
머릿속으로 금방 금방 이보다 더 좋은 문장을 쓸 수 있을 거라
이런 경우가 있는가 하면, 또 나만이 아는 이름도 있다.
—
끝까지 쓰지 못한 무수한 설명글 중 하나.
영원히 숨겨둘 생각이었지만, 그렇게 꽁꽁 사맬 정도의 내용은 아닌 듯하여.
다만, 문장이 정갈하지 못한 것은, 역시 올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기에 양해를 구함.
작중 화자의 군 계급이 처음으로 명시된 편.
화자가 처음부터 해병대였다면 문제가 덜했겠지만, 어쩌다 해군이라는 키워드에 꽂히게 되어,
상륙 해군이라는 구 시대적인 설정을 도입하여 괜한 고생을 하게 되었다.
참전 당시 화자의 계급은 Lieutenant였으며, 퇴역 시에는 훈장 수여로 특진하여 명예 Captain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간단한 상황이지만 두 단어의 번역은 어려운 일이었다.
작중 이탈리아 전쟁의 시대적 모티브였던 보어 전쟁의 참전자 명단을 조사하며,
나는 당대 영국 해군이 현대식 계급 계보를 사용하지 않음을 알았다.
영어 사전에서는 Lieutenant을 중위(소위), Captain을 해군 대령으로 번역하게 되었으나,
실은 두 계급은 같은 시대, 해군과 해병대 정도의 차이만 되어도 의미가 확연히 다르게 된다.
Royal Marines Light Infantry(RMLI)에서 Lieutenant는 하사관, 부사관 정도로 번역되는 게 바람직하며,
Captain은 그보다 한 계급 높을 뿐인 동급의 장교이다.
이를 사전대로 번역한다면 중위와 대령이 1계급 차이가 나며,
대령이 현장 지휘하는 일개 장교 취급받는 것이 된다.
비록 내가 군대 지식에 해박하지는 않으나, 이것이 일반적인 상황이 아님은 안다.
한편, 화자가 소속했던 Royal Navy(RN)에서 Lieutenant는 갑판장쯤으로 번역할 만하다.
물론 Captain은 우리가 잘 아는대로 선장, 함장과 같다.
(심지어는 배마다 사용하는 계급과 용어가 다른 탓에 이조차도 확언할 수는 없다.)
얼핏 보아도 RN의 함선을 지휘하는 선장과, RMLI의 현장 지휘 장교 계급이 동급이 아님은 알 수 있다.
이런 사정을 모두 작중 내용에 담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용어 자체가 직관적이어야 한다.
가장 쉬운 방법은 그나마 신식인 RMLI의 계급 용어를 현대식으로 치환하는 것이나,
이는 시대적 배경에도 맞지 않고, 해군의 복잡한 선상 지휘 계통과 합치할 수 없는 것이기에,
결국, 계급으로는 다소 두루뭉실하나 사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단어 선정에 집중하기로 했다.
실은 이 모든 문제의 원흉은 Captain이었는데, 단순히 선장으로 쓴다면,
화자가 배 없는 선장이며, 군 계급마저 선장이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는 탓이다.
그럼에도 결국 달리 표현할 단어를 찾지 못해서 함장으로 번역하게 되었다.
(선장보다는 군대식 억양이라는 이유로.)
Lieutenant의 번역으로는 갑판장, 하사관, 부사관, 사관, 장교을 후보로 꼽았으며,
예스러운 단어라는 이유로 하사관, 혹은 해군 소속임을 강조하기 위해 갑판장을 생각했으나,
전자의 경우 해석 여지를 지나치게 좁혀서,
후자의 경우 상륙해서 전투를 치른 장교의 계급이 갑판장인 것이 어색하여,
결국에는 최대한 광범위한 표현으로 사관이라 쓰고 말았다.
107화는 개인적으로 1부의 마지막 화로 여기는 편이다.
(다만, 웹소설 특성상, 물리적인 구분점은 없다.)
사실, 여기엔 개인적인 감정이 많이, 아주 많이 담겨 있는데.
1. 원래 이거 5화에 쓰려고 한 부분인데.
당시에 가뜩이나 늘어지는 전개가 더욱 쳐지는 묘사라고 판단하여 삭제했다.
그래도 곧 쓰겠지, 생각했는데 말 그대로 100화나 지나서 다시 쓰게 될 줄은 몰랐다.
(100이란 숫자도 좀 의미 있죠?)
늘 그렇게 언젠가 써야지, 하고 모아두는 폐기분이 있는데,
거의 항상 밀리고 밀려서 결국 완전히 삭제하고 있다.
2. 원래 한 5화쯤에 완결하려 했는데.
많은 독자분이 전망하신 대로, 또 나도 그랬지만, 본작이 유료화는커녕 장기 연재할 줄은 추모에 몰랐다.
오랜 준비 작업 중에 단순히 숨 돌릴 생각으로,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적어본 것뿐이다.
보면 알겠지만, 극초반부에는 오탈자 검사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유료화까지 이어져서, 설마 처녀작이 될 줄은 추모에도 몰랐는데.
이에 관해, 두 가지를 후회하고 있는데, 하나는 닉네임이고, 다른 하나는 제목이다.
여하튼, 본작에서 유독 실험적인 연출이 많았던 것엔 이런 이유가 있다.
늘 언제나 완결낼 무료작이라고 생각했기에 여러 시도를 장난처럼 할 수 있었다.
완결 시도는 5화에서 그치지 않았는데, 예를 들어 16화가 왠지 완결 분위기가 나는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기도 하다.
어쨌거나, 결국 말하자면, 107화의 내용은 원래 내가 상정했던 마지막 장면인 셈이다.
그 상징성을 소중히 여겨서 아주 오랫동안 당시 집필분을 가지고 있었는데,
107화에는 많은 수정을 하지 않고 그대로 써서 올렸다.
독자 분들께는 의아할 일이겠지만, 실제로 내게는 굉장히 의미 있는 내용이었던 셈이다.
작중 필레몬(주인공)의 입을 빌려 말하는 ‘이 말을 하기 위해, 오래 기다려 온 사람’은 아서만은 아니었다.
3. H. G. 웰즈 짱 좋아
네.
이러한 여러 이유로 개인적인 애착을 가지는 장면이었고,
그만큼 집중해서 쓸 수밖에 없었다.
이 부분을 묘사하기 위해, 107화는 거의 5번 정도 다시 썼다.
내용도 처음과 많이 달라졌지만, 현재의 것이 가장 낫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을 다시 쓸 수 있게 도와주신 독자 분들께는 감사할 따름.
103. 종장
104. 후기 (1)
105. 후기 (2)
106. 후기 (3)
103~106화는 상당한 눈길을 끄는 제목이다.
두 제목 모두 주로 작품의 완결을 알리는 데 쓰이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는 의도한 바이다.
쉬어가는 구간이 없는 웹소설 특성상, 이곳이 작품의 중간 반환점이자,
완결 못지 않게 많은 이야기가 끝맺음 지어지는 곳임을 명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1. 앨리스 리들
우선 <15. 짐승이 사는 거리>부터 출현하여, 작품 내내 함께 하였던 앨리스의 이야기가 일단락되었다.
실은 그녀는 작품의 많은 에피소드를 주도했다.
<늑대인간 편>에서는 조연으로 활약하였으나, 추후 출연을 예고하며 작품을 이어나갈 동력을 줬다.
(특히나 마치 완결처럼 쓰였던 에피소드이니, 재출연을 암시하는 그녀의 복선은 중요한 것이었다.)
<올드코트 대학 편>에서 앨리스는 또 한 명의 주역이었다.
<무한열차 편>의 발단은 앨리스의 친가를 방문하려는 주인공의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쉬어가는 <옥스퍼드 편>에서는 앨리스의 아버지를 만나, 그녀의 과거에 대해 들었다.
특히 이 부분은 추후 출연할 주적인 ‘에드워드’를 암시하는 중요한 부분이기도 했다.
<아이 도둑 편>에서 그녀의 활약은 대단하다 할 수는 없었지만, 추후 사용할 복선을 남겼다.
동물을 이용한 언어유희 퍼즐은 그녀의 마지막 이야기에서 다뤄졌다.
<에드워드 편>에서 앨리스는 또 한 명의 주역이었다.
<지구의 공동 편>은 앨리스 이야기의 마무리였다.
그녀의 과거사와 그녀를 통해 하고 싶었던 작가의 이야기가 모두 일단락 되었다.
동시에 앨리스는 무대에서 퇴장하게 되었다.
흑발 앨리스는 우리가 작품 내내 알아왔던 앨리스와 다른 인물이니, 그녀가 무슨 활약을 하건 동일시 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금발 앨리스는 육신이 죽음을 맞이하며, 지구에서 직접 활약할 여지를 완전히 잃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맺는 106화는 그만큼 작품에 중요했던 것이다.
나는 여기서 내용이 넘어가는 107화를 1부의 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2. 농담
사실 이 제목은 내 나름의 농담이기도 하다.
수많은 비밀을 가진 인물, 단체가 무너지며, 끝으로 향해가는 서사를 암시하였는데,
정작 그 모든 게 꿈이었다고 끝내는 게, 고전적인 코메디처럼 느껴졌다.
꿈 엔딩, 재밌다고 생각했는데.
아파서 연재 지연이 되면서, 정말로 완결이 아닌가 하는 여론이 형성되는 데 일조하고 말았다.
반성이 필요한 부분….
3. 107화의 상징성
107화의 해설에서 다시 설명하겠다.
이 부분은 작품 해설이 아니고선 알 수 없는 작가 개인의 감정이 들어가 있다.
사실 106화의 서사는 아주 약하다.
105화까지 힘차게 달려가던 이야기가 갑자기 브라운이니, 블랙이니 하는 부외자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앨리스의 결말인데, 정작 작품의 주제를 영문 모를 인물을 통해 전달하는 셈이다.
하지만 나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미 앨리스를 통해서 다 한 얘기를 다시 그녀에게 시키는 것은, 중복 서사가 된다고 믿었고,
또, 오랫동안 고생한 그녀를 조금 쉬게 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이유가 있는데, 도무지 언어화할 수가 없다.
그저 감정으로만 존재하는, 그런 이유이니, 개인 감정에 희생된 서사에는 사죄한다.
앨리스의 이야기가 맺음지어졌다.
그 중요성에 관해서는 아래 링크 참고.
rottenlove.tistory.com/39
작품에 있어서 처음이자, 상당히 실험적인 연출이 여러 사용된 편이다.
특히나 눈에 띄는 것은 작중 처음 타인의 시점으로 진행된 내용이란 것이다.
이 부분에 있어선 많은 고민을 했다.
현재 작품의 설정이 ‘독자 = 필레몬의 무수한 자아 파편’이란 것인데,
어떻게 독자가 앨리스의 내면을 엿볼 수 있을까.
이런 설정 충돌을 감수할 만큼, 의미 있는 내용을 쓸 수 있을까?
때문에 나는 두 가지 내용을 준비했다.
앨리스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부분과, 오직 주인공 시점으로만 진행되는 부분이었다.
아무래도 후자보다는 전자가 더욱 재밌게 느껴졌기에, 결국 후자 집필분은 폐기되었다.
1. 앨리스 리들
앨리스는 특이한 인물이다. 그녀는 실존 인물이면서, 동화에 걸쳐 있다.
그것을 표현한 소품은 머리카락 색이다.
실존했던 앨리스 리들은 알려진 이미지와 달리 흑발이었고, 또 동화와 달리 여린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고로, 금발 앨리스는 비현실, 꿈에 사는 인물이다.
그녀는 주변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그로 인해 고립되어 있는 인물이다.
오직 자신의 이상에 충족하는 필레몬(주인공)의 곁에만 다가오며,
또래나 담당 교수 같이 사회 생활을 함께 해야 하는 대상과는 전혀 친하지 않다.
즉, 그녀는 순수한 에고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오해하지 말 점은, 그녀가 페르소나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녀는 필레몬과 관계를 쌓길 원하고 있고, 또 자신이 남들에게 특이한 존재로 보이길 원한다. 그것이 곧 앨리스의 페르소나이다.)
반대로, 흑발은 실존하는 앨리스의 것, 현실을 상징한다.
그녀는 소극적이고, 현실에 순응한 인물로, 추후 인물의 성장마저 상징한다.
그러니, 학습을 통해 성숙하며, 충분히 자신의 충동을 억누를 수 있는 슈퍼에고를 대표한다.
금발 앨리스가 결국 흑발 앨리스로 완성되는 것은, 인물의 성장을 상징하는 바이다.
즉, 표면상의 비극과 달리, 상징성만을 살핀다면,
앨리스는 자신과 마주하여, 끝내 인격적으로 성숙한 해피엔딩이라 할 수 있다.
2. 루이스 캐롤
앨리스 서사에 루이스 캐롤을 배제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지막을 제외하고, 그의 이미지는 모두 왜곡되었다.
(다만, 그의 속성이라 할 수 있는 영어 말장난은 금발 앨리스가 다수 사용하며 꾸준히 존재감을 환기했다.)
<무한 열차 편>과 <옥스퍼드 편>에서 그는 드림랜드를 떠도는 자로 등장했다.
그 때문에 어떤 흑막을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았다.
앨리스의 유년기 당시, 그는 자신의 선의와 달리 사악한 능력을 가진 것처럼 묘사되었다.
그로 인한 작중 긴장감 형성을 맡았다.
그의 죽음은 역사 개변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로 쓰였다.
이는 추후 에드워드의 간섭이라는 복선 회수로 화한다.
<앨리스 편>에선 흑발 앨리스가 어릴 적 두고 온 존재를 암시하는 듯 쓰여진다.
허나, 그녀가 두고 온 것은 금발 앨리스였다.
루이스 캐롤이 온전하게 등장하고 사용된 것은 마지막 복수의 순간이 유일했다.
그는 꿈과 현실의 등대 역할을 하며, ‘내가 있는 곳이 꿈’이라 단언한다.
덕분에 필레몬은 에드워드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고, 그의 죽음을 현실이라 제대로 인지하여, 에드워드를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었다.
묘사 자체가 두루뭉실하고, 몽환적인지라 많은 독자가 혼란을 느낀 듯하여, 역량 부족을 실감한 부분.
3. 에드워드
에드워드는 앨리스 서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다.
그녀의 비극은 모두 그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앨리스 본인도 그의 가장 큰 적이었다.
사실 이는 상징적으로도 부합하다.
에드워드는 클라이막스에 직접 발언하기도 하지만, 그야말로 인간의 본능, 이드를 상징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죽음에 저항하고, 욕구에 충실하며, 파괴적인 속성을 지닌 그야말로 본능의 총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까지 갈 것도 없이, 꿈은 인간의 욕구를 반영하는 걸로 동서양에 옛부터 인식되었다.
그런 그가 꿈을 관장하는 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다.
즉, 여기서 꿈이란 바로 인간 내면의 에고가 있는 심층을 의미한다.
(106화 언급되는 ‘이면은 내면’이라는 것은 이를 말한다.)
반면, 에드워드와 달리 사람은 본능대로 살아가지 않는다.
모두 에고와 슈퍼에고의 균형을 유지하며, 나름의 페르소나를 구축하고 유지하려 애쓴다.
그 모든 제약이 반전된 것이 이면, 꿈의 세계이다.
현실에는 질서, 이성이 주를 이루고,
꿈에는 폭력, 화재, 피, 죽음, 그리고 저항 같은 원초적인 욕구가 가득한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
이드의 세계에서는 슈퍼에고로 구성된 종교가 살아 남을 길이 없다.
전통적인 종교 가치관을 상징하는 케이시 오’ 제럴드가 그렇게 무력한 것은 당연하다.
(참고 : rottenlove.tistory.com/4 )
이 부분은 사실 앨리스 서사에서 다뤄지지 않는다.
106화의 브라운과 블랙이 이 부분의 해석을 맡는다.
(참고 : rottenlove.tistory.com/39 )
4. 반전
금발 앨리스, 흑발 앨리스가 반전된 이미지를 상징하는 건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본작에서는 여러 대조적인 이미지를 도입한다.
-채도
금발, 흑발
-진행 방향
금발 앨리스의 이야기는 위(우주선)에서 시작해서, 아래(3층에서 추락)로 마무리된다.
흑발 앨리스의 이야기는 아래(지하 세계)에서 시작해서, 위(열기구로 탈출)로 마무리된다.
-내면
금발 앨리스는 표면은 외향적이지만, 내면은 아주 우울한 성격이다.
흑발 앨리스는 표면은 차분하지만, 내면은 소녀답고 유쾌하다.
-외면
금발 앨리스가 보는 세상은 참혹하고 현실적이다.
또래들은 그녀를 무시, 경멸하고 압박한다. 세상은 그녀에게 죽음을 요구한다.
흑발 앨리스가 보는 세상은 동화적이다.
그녀는 두 발로 걷는 토끼 같은 환상의 존재를 만나, 왕자에게 구해지는 동화적인 구성을 따른다.
-추구
금발 앨리스는 자신에게 흑색을 칠한다.
그녀는 자신을 속이기 위해, 내면을 투영하는 거울을 검은 페인트로 가리기까지 한다.
흑발 앨리스는 금발 소녀를 쫓는다.
그녀는 진짜 자신과 마주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서로 닮지 않은 쌍둥이
작중 직접 언급된 키워드는 모두 상호의존적인 반전 이미지이다.
어느 하나가 존재하기에, 다른 하나가 존재할 수 있으나, 반대로 곂치는 부분은 하나도 없는 여집합 말이다.
하나는 낮에 살았고, 다른 하나는 밤에 살았다. 하나는 빛 아래 있었고, 다른 하나는 그림자 아래에 있었다. 하나는 살았고, 다른 하나는 죽었다. 하나는 사적인 하임리크였으며, 다른 하나는 보편 속의 언캐니였다.
– <102. 앨리스 (4)> 中-
참고로 ‘하임리크 = 캐니’ ‘언하임리크 = 언캐니’로 언어의 차이만 있을 뿐, 의미는 같다.
다만 국내에서 통상적으로 캐니라는 표현도, 언하임리크라는 표현도 본 적이 없기에 어감을 위해 이렇게 사용했을 뿐이다.
-제목
실시간 연재되는 것을 본 독자는 알겠지만, <앨리스 편>에는 이중 제목 구조를 사용하였다.
<88. 지구가 가라앉는 날 / 휴프노스의 신탁>
이런 식으로.
앞 제목은 <지구의 공동> 파트가 현실이며, <우주 전쟁> 파트가 꿈이라 주장한다.
뒷 제목은 <지구의 공동> 파트가 꿈이며, <우주 전쟁> 파트가 현실이라 주장한다.
결국, 에드워드에 의해 <지구의 공동> 파트가 현실로 확정되며, 제목은 모두 앞 제목으로 수정되었다.
이 부분은 문피아 연재분 작가의 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외적으로 <90. 지구의 공동, 설산 / 추락몽墜落夢, 설산>에서는
에드워드에게 실제 있었던 <설산> 파트는 여지 없이 현실이기에 두 제목 모두 사용했다.
5. H. G. 웰즈
내 최고의 실수. 나는 이번 에피소드가 H. G. 웰즈에 대한 헌사가 되길 바랐다.
그도 그럴 것이 에피소드의 대단원을 장식하는 것이, 그의 명서인 <타임머신> 아닌가!
그래서 나는 <우주 전쟁>과 <지구 속 여행>을 대조하며 진행하고, 끝을 <타임머신>으로 장식하려 했다.
그런데 이게 왠일! <지구 속 여행>은 쥘 베른 소설이잖아!
고로, 그르쳤다.
참고로 H. G. 웰즈에 대한 헌사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무한 열차 편>은 H. G. 웰즈를 이용한 여러 이름이 등장했다.
필레몬 허버트와 조지 허드슨 주니어가 대화하며, 고속열차 웰스호 탑승하니 말이다.
다만, 철도왕 조지 허드슨 자체는 실존 인물이다. 그 이름에서 착안한 재밌는 말장난이었다.
종종 오는 슬럼프가 직격했다.
문장에 뭔가 문제가 있는데 그것이 뭔질 모르겠다.
서사에 뭔가 문제가 있는데 그것이 뭔질 모르겠다.
순서가 맞지 않는 걸까? 문장 구성은 멀쩡하게 보이는데.
재밌는 문장도 없고… 마무리 문장도 임팩트를 주기에 아쉽고.
어쩌면 순서를 틀렸을지도 모르겠다.
역시 5편 정도 맞는 에피소드를 이어놓고, 그 후에 전개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불만, 거대한 불만….
고래의 꿈… 거대한 꿈….
작가 개인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면 안되는 것이 참 난처.
조금만 더 확장하면 아주 괜찮은 표현이 될 것 같은데, 사산아처럼 불연소한 문장이 많아 아주 서운했던 편.
졸리니 짧게.
-시속 삼십만 마일
계산을 많이 했는데, 지워 버려서 없어졌다.
어찌저찌 역산하면 1여분 사이에 잠에서 깨어났다는 아주 재밌는 묘사가 된다.
시간과 속력, 거리 단위를 오용하는 것은 늘 즐거운 일.
-아쉬운 문장 3선
상실은 무엇보다 현실을 직시하게 했다.
현실 위에 어렴풋한 기억이 막처럼 씌워져 있었다.
홀로 온전한 정신을 가진 나는 여기선 유령이었다.
-재밌게 쓴 문장 3선
런던의 음지에는 저마다의 규칙이 있었다.
정신은 본디 장기와 같은 것이다.
(몰라요)
희곡 구성을 차용한 특이한 시도가 들어간 편.
상징물이 많은 만큼 얘기할 것이 많다.
(때문에 케이시가 나올 때마다 머리가 아파요!)
-한여름 밤의 꿈
익히 알려진 영문학의 시조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제목이다.
말 그대로 한여름 밤의 꿈이기도 하며, 희곡 구성이기도 하여 제목을 차용하였다.
제목뿐만 아니라, 필레몬의 대사인 “죽어 간다, 죽는다, 죽었다” 또한,
한여름 밤의 꿈에 나오는 “Now die, die, die, die, die”의 차용이다.
실은 희곡 구성을 사용하려 한 에피소드는 따로 있었다.
그만큼 충동적인 연출이었는데, 실은 두 신적 존재의 대화를 평어체로 구사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희곡은 예로부터 온갖 신과 정령이 나와 인간처럼 대화를 나누니,
이야말로 신적 존재간의 대화를 연출하기 딱 좋은 방식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나중에 희곡체 에피소드를 어떤 식으로 전개해야 할지 난처할 따름….
-부활 신화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세 번 사람을 살리는 기적을 일으켰다.
그중 마태복음 9장 24-25절에 이런 문장이 있다.
24 he said, “Go away. The girl is not dead but asleep.” But they laughed at him.
25 After the crowd had been put outside, he went in and took the girl by the hand, and she got up.
차용한 것은 관 안에 든 잠든 시체와, 손을 잡고 일어난다는 부분.
케이시가 행한 기적이 중세 기독교적 세계관 속에 있음을 암시하는 바이다.
-만 가지, 삼천 가지
만이란 숫자는 영어에서 무한을 의미하기 어렵다.
우선 운율부터 ten thousand니 희곡 구성을 해치게 된다.
영어에서 주로 무한을 상징하는 숫자는 천(1,000)이고, 한자권에서는 만(10,000) 혹은 팔(8).
thousand라고 되어 있는 것을 번역했다면, 기왕이면 만이라고 번역하고 싶다.
다만, 나중에 삼천 가지로 수정하였는데, 이는 삼천이라는 숫자가 올드코트에 중요하기 때문.
깜빡 잊고 만이라 쓰고 말았다가 부랴부랴 수정했다.
-진리를 감각 아래 두지 마라.
실은 케이시가 말하는 이것 역시 중세 기독교 문화적인 사고관이다.
신이 창조한 세계의 절대성이 인간의 상대성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 말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하지만, 칸트의 출현 이래 인간의 우주관은 더 상대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이것이 현대인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소위 말하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이 문장을 통해서 케이시가 구 시대 종교를 대변하는 그릇된 존재임이 분명해진다.
애초에 케이시는 17세기 사람이다. 그가 근대 시대를 따라오지 못하는 건 당연할 테지.
-태양
태양은 만물을 비춘다. 이는 케이시가 말하는 지혜, 기독교적 세계관의 복음이다.
과거 교회와 수도원은 인간의 계몽을 맡았던 기관이지 않은가.
허나, 그 밝음은 달과 별을 가린다. 이것이 케이시의 본질이다.
그는 어둠을 가려 인류를 구하는 구원자인 동시에 우주를 바라볼 수 없게 눈을 가리는 방해자이기도 하다.
진실과 진리보다 선한 믿음을 앞세우는 것이다.
그 의도가 악하진 않지만, 인류의 계몽을 위해선 넘어서야 하는 존재임이 필연이다.
-필레몬 허버트
필레몬의 세계관은 자기중심적이다.
나로 완성되는 자아를 가졌고, 어느 원시적인 신앙에도 의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는 무지와 공포로부터 싸울 수 있는 것이다.
훌륭한 주인공의 재목.
작업을 하면서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다.
백 투 더 퓨처에서 드로이얀을 타고 과거로 날아오는데 사용한 속도가 시속 88마일이라는 것이다. 본 소설 작중 등장한 인류 한계 속도와 곂치니 재밌는 우연이었다. 하지만 마냥 우연으로 치부하기는 어려운 것이, 88이라는 숫자에는 어느 정도 필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1. 무한과 시간의 관계
백 투 더 퓨처의 감독님이 나와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면, 무한을 연상시키는 8을 시간과 엮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는 무한이 가진 특수성 때문인데,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무한과 시간을 항상 같이 다뤄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저서 ‘자연학’을 통해 무한이 실재하지 않는 개념이라 밝혔으나, 오로지 시간과 개념상의 우주만이 무한할 수 있다고 정의했다. 탁월한 접근 방식에, 흥미로운 결론이다. 이와 비슷한 개념은 칸트에게도 이어졌고, 무한을 수학적으로 해석하는 현대에도 무시하지 못할 개념임은 분명하다.
2. 8을 이용한 것 중 현실적인 수치
마일 단위는 참 절묘하다. 킬로미터라면 그리 절묘한 숫자가 나오지 않았을텐데, 88마일은 절묘하게 현실과 몽상 사이에 있는 숫자이다. 이르지 못할 것은 없지만, 정작 현실에서는 보기 힘든 속도, 그것이 바로 시속 88마일이다.
내 소설의 배경이 19세기 런던, 즉, 시속 88마일 운송수단이 상용화 되지 않은 시대라는 점도 이런 소재를 다루기 쉽게 도와줬다. 에펠탑 낙하 사건은 그야말로 번뜩이는 착상이었는데, 아주 재밌게 녹여낸 것 같다.
3. 뭔가 또 있었던 거 같은데
88마일에는 또 하나 주요한 착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전혀 기억이 안 난다.
뭐였더라?
여하튼, 이렇듯이 시속 88마일에는 필연성이 있으니, 비슷한 소재로 동일한 착상에 이르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예컨대 수렴진화 같은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