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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덩어리

    어릴 적부터, 나는 멈춰 있는 세상을 본 적이 없었다. 벽은 쉼 없이 꿈틀거렸고, 천장에는 길게 이어진 검은 덩어리가 내려왔다 올라갔다를 반복했다. 온 세상은 검은 것으로 도배되어 있었고, 운이 좋아야만 간신히 그 사이로 사물의 원형을 볼 수 있었다.

    “색맹인 것 같습니다.”

    의사가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나는 색깔을 볼 수 없는 게 아니었다. 그저 세상이 검은색으로 뒤덮여 있을 뿐이었다. 아이에 불과했던 내 빈약한 표현력으로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었고, 나는 전색맹 판정을 받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부모님은 의사의 말을 믿었다. 색맹을 위한 그림책을 사주거나 했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내가 그것을 전혀 보지 못하자, 내가 겪고 있는 증상이 색맹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을 펴면 처음 몇 초 동안에는 그것을 볼 수 있었지만, 곧 검은 것들이 우글거리며 그 위를 뒤덮었다.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물의 윤곽선뿐이었다.

    나는 여러 병원을 다녔다. 눈은 물론 뇌 검사도 받았다. 그렇지만 어느 큰 병원도 마땅한 답을 내지 못하자, 우리는 서서히 그것을 받아들이게 됐다. 내가 남들보다 조금 불행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우리 가족은 내 삶을 이해하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부모님은 내가 책이나 텔레비전을 볼 시간에 운동을 하고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해줬다.

    시간은 흘렀고,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남들과 조금 다른 점 때문에 나는 좀처럼 남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친구들은 모두 비슷한 키였기 때문에 심지어 나는 그들을 구분하지도 못했다. 아이들은 내가 보고 있는 검고 우글거리는 덩어리에 대해 이해하지도 못했고, 나는 그것을 설명하는 것을 관뒀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돌아오니 부모님이 먼저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가방만 방에 두고 곧바로 차에 타 어디론가 실려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자, 어머니는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고 말했다. 시골에 사시는 외할머니가 위독하다는 것이다. 나는 창문이 닫힌 채로는 검은 것 때문에 밖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창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봤다. 옆을 지나가는 차 위에 얹어져 있던 검은 것들이 뒤로 날아가고 있었다. 마치 자동차 뒤로 검은 끈이 생긴 것 같았다. 도로와, 저 멀리 보이는 산은 쉴 새 없이 꿈틀거렸다. 나는 2시간 동안 그 꿈틀거림을 멍하니 바라봤다.

    병원에 도착한 우리는 중환자실로 이동했다. 복도를 걷던 나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누군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나는 불안해져 주변을 둘러봤지만, 그 소리를 들은 것은 나뿐인지 주변의 누구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무서워져 어머니의 손을 꼭 쥐었다. 어머니는 오해했는지 “할머니는 괜찮을 거야.” 하고 나를 위로해줬다.

    할머니라고 하는 검은 덩어리는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그녀의 주변에는 무언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지만, 나는 그것들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의료 기구일 것이라 추측했다. 의사가 부모님을 향해 마음의 준비를 할 것을 권했다.

    그 순간, 나는 이상한 것을 보았다. 할머니가 누워 있던 자리에, 한 늙은 여인이 나타난 것이었다. 내가 태어나서 본 것 중에 유일하게 검은 것에 뒤덮이지 않은 그녀는, 내가 오직 책에서만 볼 수 있었던 온전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우리를 바라보더니 비명을 질렀다. 검은 것들이 그녀의 다리를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여인이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는 동안에도 그것들은 착실히 그녀의 몸을 뒤덮었다. 그리고 입으로, 귀로, 코로, 모든 구멍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더니 내게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여인은 점점 작아지기 시작하더니, 머지않아 그녀가 서 있던 자리에는 정적만이 남았다.

    “임종하셨습니다.”

    의사가 말했다.

    “좋은 곳에 가셨을 거야.”

    아버지가 말했다.

    “아빠가, 사람이 죽으면 사후 세계로 간대.”

    그 아이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사후 세계에는 뭐가 있을까?”

    “개미.”

    내 눈에 담긴 두려움을 본 걸까. 그 아이는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난 죽지 않을래.”

    나는 슬픈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누구도 그럴 수 없어.”

    옛날에 썼던 것.

    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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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과 시간

    본작은 연대기적 구성을 따르고 있다.
    시간순으로 사건이 발생하고, 그 결과와 여파를 착실히 묘사하는 형태로 작중 전개를 이끌어 간다.

    그에 반해 시계열은 주요하게 다뤄지지 않고 있다.
    이는 시간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구체적인 시기를 묘사하는데 들이는 품이 적다는 의미이다.

    이유는 여럿 있으나, 미관상의 이유가 가장 크다.
    일일이 날짜를 나열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설명문에 아라비아 숫자가 자주 나오게 되는데,
    이것이 한글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아서 보기 싫다는 개인적인 감상이다.
    우리말로 이뤄진 수사를 사용할 수도 있지만, 수사는 가독성을 해치며 통일감도 떨어트려서 기피한다.

    그러기에 나는 사건 발생일을 추측할 만한 간접적인 요소를 여럿 배치하고 있다.
    그 요소는 아주 다양하지만, 그나마 자주 인용되는 것은 크게 셋으로 나눠진다.

    첫째는 저번 사건과 이번 사건의 간격이다.
    모든 사건이 시작하기 앞서 저번 사건으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월이나 주 단위로 묘사를 빠트리지 않고 있다.
    그 때문에 매번 일자를 언급하는 일 없이도 어떻게 시간이 흐르고 있는지 파악하기 용이하다.

    둘째는 필레몬 허버트(작중 화자)의 출근일이다.
    교수직을 겸일하고 있는 필레몬은 작중 한 번밖에 묘사되지 않았지만, 늘 같은 요일에 수업을 나간다.
    바로 화요일과 금요일이다. 파악할 수 있는 시간과 비교해보면, 그가 성실하게 교수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드물게 예외는 있는데, 그때마다 바빠서 수업이 없는데도 출근했다는 사담이 붙곤 한다.

    셋째는 달의 형태이다.
    달의 형태로 시간을 표현하는 건 보다 작품 외적인 이유가 크다.
    본작에서는 밤은 주요한 무대로, 저 하늘의 져버린 해, 별, 그리고 어둠마저 저마다 상징적인 역할을 가진다.
    어느 하나도 작품 주제와 닿은 불온한 요소라, 쉽게 묘사하기가 어렵다.

    반면, 달은 반복하는 평온한 이미지를 지키고 있다.
    그 덕에 일상적인 시간을 묘사하는 역할을 부여하기가 쉽다.
    다만, 매번 묘사할 때마다 해당 일의 달 모양을 계산하는 건 귀찮은 일이기 때문에, 아래 사이트에 도움을 받고 있다.

    www.moongiant.com/moonphases/december/1896/Full & New Moon Schedule For December 1896See the Full Moon, New Moon and Quarter Moon Phase will occur durning December.www.moongiant.com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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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나 外

    누나가 거북을 데려왔다.
    죽지 않으니 내게 알맞다고 한다.
    누나는 거북보다 일찍 죽었다.



    진동하는 별의 소리에 놀라 깨었다.
    울음, 웃는 건 확실히 아니고.
    다시 들으니 역시 우는 게 맞았다.



    어깨가 들썩거린다.
    심장이 뛸 때마다 그랬다.
    고동과 고통은 닮았다.

    개미는 시체를 먹고 산다.
    누가 죽어야 개미가 사는 것이다.
    우리 할머니도 반쯤은 개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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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나

    어제 누나가 죽었다. 자살이었다.

    알게 된 것은 오늘 새벽이었지만, 정확히 언제쯤 죽었는지 알지 못했다. 경찰관도, 부검의도 알려주지 않았다. 

    가족이 죽었다. 자살이었다.

    알게 된 것은 어제였지만, 정확히 언제쯤 죽었는지 알지 못했다. 말하지 않은 건 실수인 듯했지만 물어보면 괜히 상대를 지적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하지 않았다. 그건 내 잘못이었다. 상주로서 수 차례 물어보는 질문 중 가장 곤란한 것이 언제 가족분이 별세했는지였다. 그때마다 나는 아홉 시에 죽었다, 열두시에 죽었다 등등 되는 대로 대답해서, 가족은 온종일 자살하는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지금은 관 속에 있을 가족의 모습을 영정으로 엿볼 때마다 질투가 치솟았다. 아마 먼저 죽는 건 내가 될 줄 알았는데, 선수를 빼앗긴 것이다. 그 때문에 죽은 사람은 편하게 누워 있는 동안, 나는 혼자서 복잡한 장례 절차나 행정 업무를 다 도맡아야 했다. 소리를 질러도 평소처럼 고함으로 돌아오거나 하지 않아서 나만 멀뚱히 바보처럼 보이게 되었다.

    별로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이상하게도 부고를 들었을 때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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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에서 머리가 자란 날 外

    나무에서 머리가 자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떡잎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영락없이 머리다. 태아처럼 투명하고 만지면 푸욱 꺼지는 부드러운 머리였는데, 점점 커지더니 머리카락이 자라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은 검은색이었는데, 머리카락이 까슬 거리는 직모라 쓰다듬으면 찔리고 말았다. 찔린 자리에서 피가 나길래 만지는 것은 그만뒀다.

    눈꺼풀은 있었는데 언제나 감고 있어서 눈알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열어젖힌다면 확인은 할 수 있겠지만, 내 모습을 보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나는 언제든 나무가 나를 엿볼 수 있겠다 싶어서 불을 끄고 커튼을 쳤다. 귀도 있었는데 나는 그것이 꼭 필요한지는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무도 노래를 들으면 잘 자란다는데, 그렇다면 귀를 달 것도 없이 소리를 들을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나는 원예가가 아니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입이었다. 머리는 가끔씩 우물거리기도 하고, 혀를 내밀기도 하고, 목소리도 왕왕 냈다.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걸까 싶어서 귀를 들이밀었더니 그대로 귀를 물렸다. 귓바퀴에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머리는 계속해서 커지더니 어느새, 내 머리보다 조금 더 큰 것이 되었다. 어디까지 자라나 계속 보고 있었더니 갑자기 말하기 시작했다.

    “고마워요.”

    나는 기분 나빠져서 나무를 베어버렸다.

    아기는 섭씨 15도에서 25도 안팎의 온도에서 태어난다. 습도는 60%가 적당하며, 시간은 해가 진 뒤가 적당하다. 여름에는 주로 22시에서 2시 사이이며, 겨울에는 18시에서 24시 사이이다. 갓 태어난 아기는 피부가 건조하니 따뜻한 물로 적신 수건으로 덮어주는 것이 좋다. 아기는 종종 물에서 태어나는데, 이 경우 재빠르게 건져줘야 한다. 아기는 태어나면서부터 헤엄을 칠 줄 알기 때문에 개인차가 있으나 10분에서 20분 사이는 물에 방치 해도 문제없다. 주변에 뜨거운 물건이 있는지 신경 쓰는 것이 좋다. 갓 태어난 아기가 다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거울 속에 검은 상복을 입은 내 모습.

    너무 아름다워 몇 시간이나 쳐다보고 말았다.

    관에 누워있는 누군가는 한없이 나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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