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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하는 구절

    얼마 전 나는 기막힌 감정의 불꽃에 사로잡혔다. 나는 히틀러에 관한 책을 뒤적이다 사진 몇 장을 보곤 감격했다.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어린 시절을 전쟁 통에서 보냈다. 내 가족 중 몇몇은 나치 수용소에서 죽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이, 되돌아갈 수 없는 내 인생의 한 시절,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해 줬던 히틀러의 사진에 비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러한 히틀러와의 화해는 영원한 회귀란 없다는 데에 근거한 세계에 존재하는 고유하고 심각한 도덕적 변태를 보여 준다. 왜냐하면 이런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처음부터 용서되며, 따라서 모든 것이 냉소적으로 허용되기 때문이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이재룡 역)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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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년 6월 4일 – 시끄러워

    심장 소리가 시끄럽다는 사실을 너무 일찍 깨달은 탓에 나는 영구적인 불면증을 겪게 되었다.
    그리고 선풍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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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년 6월 3일 – 한 근에 2100원

    누군가 보는 일기를 쓴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기분이다.
    보여주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고, 숨길 방법이야 많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이는 푸주한의 사명이다.
    일찍이 나는 나 자신의 토막내어 시장에 전시해 두지 않았던가.

    비록 섬세하지는 않더라도 단호하게, 일말의 동정심도 없이 기계적인 동작을 수행해, 248조각으로 등분하여 지금도 자랑스레 고리에 걸어 전시해 두고 있지 않던가.
    신선한 고기는 푸주한의 자부심이고, 팔리는 것은 기쁨이어야 한다.

    때문에, 나는 속살을 드러내는 데에 거부감을 품어서는 안될 노릇이다.
    (거부감은 기쁨에 상반된 감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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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년 6월 2일 – 생각을 말하는 것은 공격적이다.

    사회에서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는 것보다 공격적인 행위가 있을까?
    (폭력이나 욕설 등의 반사회적이지 않은 행위에 한하여)

    이는 나만의 생각도 아니고, 또한 참신하거나 새로운 관점도 아니다.
    작은 사회에서는 가십(뒷담)과 같은 형태로 나타나고, 큰 사회에서는 정치의 형태로 나타난다. 둘 모두 여지없이 폭력적이라는 사실에 반박할 사람은 드물 테지.

    하지만 이것은 사회에 국한된다. 밀란 쿤데라는, 모든 도덕적 판단을 중지하는 것이야말로 소설의 도덕이라 주장했다. 문학의 세계에서는 윤리적 자태는 의미가 없기에, 한없이 창발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즉, 문학을 하며, 사회를 살아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도덕적으로도 옳지 못하며, 성립할 수도 없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고 또.

    버들나무의 잎사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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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년 5월 24일 – 피츠제럴드도 아니고

    피츠제럴드는 돈을 위해 글을 썼다.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그는 할리우드에서 글을 썼다. 그리고 아주 많은 작품을, 단편들을 돈을 받고 써냈다. 이 때문에, 피츠제럴드는 항상 평가절하당했다. 하지만 사실은 어떤가? 문학이 돈과 분리되었던 시대가 진정 있기는 한가? 실로 기이하다. 자기완결을 위해 일생을 바친 극소수의 기인이 만들어낸 이미지에, 문학의 실체는 완전히 부정당해, 질식되어 소멸하고 만 것이다. 심지어 이 허무맹랑한 신기루에 홀려, 지금 같은 시대에도 수많은 젊음이 비실존하는 문학을 향해 허망한 투신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운 좋게도 나는 그 역학을 벗어났다. 해답 없는 탐미주의와 자아실현의 몽상에서 빠져나와, 오직 돈을 위한 글을 쓰게 된 것이다. 이는 내 경력이 일천하여 어떤 허물을 쓰는 데도 거부감이 없었기 때문이고(꽤 나중에 알았지만, 이것은 꽤 주요한 소질이었다.), 또 천만다행하게도 사람들이 사주는 글을 쓰는 법을 익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가장 주된 이유를 말하자면, 내게 아주 많은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그래서 지금은 어떠한가? 내 것이 아닌 채무는 끝났고, 나는 본디 그런 거금을 원치 않는다. (이 점에 한해서는 피츠제럴드보다 운이 좋다고 할 수 있겠지.) 긴 세월 억눌렸던 자아는 다시금 실존하지 않는 신기루(자아 실현, 작품, 문학)를 향해 나아갈 것을 호소한다. 밤마다 문호들(헤밍웨이, 도스토프옙스키, 미시마 유키오)의 허깨비가 내게 다가와 손을 내민다. 완전히 미친 짓이다. 하물며 나는 이제 젊지도, 진정 열의를 담아낼 글(신기루)을 쓸 수도 없을 뿐더러, 쓰길 원하는 지조차 알지 못한다.

    피츠제럴드는 돈을 위해 글을 썼다.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어찌 그랬을까.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전체글 작업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완결) 단편 기타 유서 일기 수필 무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