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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12월 7일 – 고통은 영원하다

    나는 왜 이렇게 잘하는 게 없지.
    단 하나 욕심을 내고 있는데도, 나처럼 노력하고도 재주 없는 사람이 또 있을까.
    내세울 것은 무엇도 없다. 나는 땅속의 개미보다 못하다.

    하소연을 할 수 없는 게 특히나 괴롭다.
    이 마음은 온전히 홀로 다스려야 하는 것이고, 밖으로 내서는 안 되는 불쾌한 감정이다.

    작가를 향하는 길은 그렇다. 방구석에 고립해서 편협한 사고방식을 쌓아가야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그 담금질을 견뎌내지 못할 나 같이 무딘 철은 부러지고 죽겠지만.
    설령 뭔가 완성된다 할지라도, 그저 불순물 섞인 고철더미가 되고 말 것이다.

    앞에 펼쳐진 칠흑 같은 여로를 보고 있자니, 너무 두려워서 나 혼자서는 당해낼 재간이 없어 보인다.
    잔인한 세상이다. 뼈 저리게 무능하고, 열정 없는 나는 곧 죽는다.

    나도 글을 잘 쓰면 좋겠다. 아니면 욕조가 있는 집에서 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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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11월 21일 – 요즘 자주 하는 망상

    -하루에 2편 올리기
    ‘와, 연참이다!’
    훗…

    -매일 연재하기
    ‘요즘은 성실하게 올라오네요.’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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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11월 21일 – 변화

    죽음과 변화가 너무 가깝다.
    이토록 잔인한 세상에 왜 태어났을까.

    이럴 줄 알았다면, 영원히 변하지 않는 찬 우주가 좋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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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11월 21일 – 본업

    아침 6시부터 지금까지 12시간 동안 글을 지우고 있다.

    글을 지우는 것이야말로 나의 본업이다. 쓰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안이나 밖이나 쓰레기 같은 문장이 넘쳐나서 새 창작이 발 디딜 틈이 없으니, 나는 이 글을 모두 지워야 하는 것이다.

    한참 글을 덜어내고 뒤를 돌아보면, 지우고 온 만큼 같은 양의 쓰레기 같은 문장이 다시 놓여 있다. 욕심인가, 미련인가. 무엇이든 나처럼 재능 없는 자가 가질 마음이 아니다. 떨쳐내자, 떨쳐내자.

    나의 명함에는 작가가 아닌 청소부라는 직함이 적혔는데, 실은 쓰레기를 제대로 치우지도 못하니 이조차 너무 과분한 호칭이다. 나는 작가를 꿈꾸기 이전에 청소부부터 되어야 순번이 바르다. 나는 대체 뭘 쓰고 있단 말인가.

    키리에 엘레이손, 키리에 엘레이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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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11월 19일 – 잠

    불과 반 년 전까지 밤샘도 참 수월했는데, 근래에는 졸리면 의사와 관계 없이 잠들고 있다.
    이러다가 기면증에 걸리는 건가 싶기도 하고.

    생물은 왜 자는 걸까, 불공평하게.
    잘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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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9월 16일 – 격세지감

    위 사진을 찍었을 무렵이 아마 2020년 4월 1일인가, 2일인가.
    당시에 굉장히 뜨거운 반응이라고 생각하여 감동받고 찍었던 걸 오늘 발견했다.

    그래서 비교를 위해 당일 사진을 추가로 첨부.
    음… 음… 어… 어어… 어쩌다 이런 일이 되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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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8월 25일 – 정원

    제게는 정원이 있었으면 하고 늘상 생각했습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아서 잡초가 무성하고, 나무 밑동이 축축하게 썩어가는 고약한 정원 말입니다.
    바위를 들추면 그 아래에서 갖은 다족동물이 빛에 놀라 달아나고, 고인 빗물은 빠져나갈 곳이 없어서 땅은 서서히 삭아갈 것입니다.
    결국 그 악취에 누구도 다가오지 못하고, 도심 한가운데에 생명의 낙원이 완성될테죠. 빛을 싫어하는 동물만이 이 정원에 살 수 있습니다. 이끼와 부식동물이 적당할 겁니다.

    저는 그런 정원을 늘 가지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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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8월 25일 – 해파리

    짱이야~

    최강의 바다 생물, 해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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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8월 10일 – 사랑

    우리는 투명한 어항이다. 그 안에서 헤엄치는 붉은 금붕어야말로 이성이라 부를 만한 것이다.
    처음에는 훤하고 총명하던 어항의 표면에 흐릿한 흰 때가 묻는다.

    물때나 물고기 똥 같은 것이다. 깨끗한 물은 탁하게 변해, 그 본질을 흐린다.
    안타깝지만, 나는 그것이 사랑이란 걸 오늘 아침에 깨달았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 똥을 주고 받으며, 그것을 아름답다고 숭배하는 셈이다.
    내 생각에 그건 별로 아름답지 않은데.

    그러면 안 좋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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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8월 7일 – 일본과 캄브리아기

    일본 소설을 보다 보면 유독 캄브리아기 생물에 관한 묘사가 많다.
    <그로테스크>의 할루키게니아, 삼엽충, 아노말로칼리스 등, 국내 정서로는 이해할 수 없는 빈도의 등장이다.

    나는 그에 한 가지 가설을 세웠다.

    우리가 어린 시절 벽에 알파벳이나 한글, 세계지도 따위를 붙여놓은 것처럼, 어쩌면 일본의 특정 세대에는 캄브리아기 바다 생물을 다룬 벽지가 유행하지 않았을까.
    그 결과 창작을 주도하는 일본 기성 세대 사이에 캄브리아기라는 공통 정서가 싹트고, 이것이 반영된 결과물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 유행은 캄브리아기처럼 금새 지나갔을 것이다. (대략 5천만년 정도 사이에)
    요즘 등장하는 창작물에는 캄브리아기 생물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대멸종이다.

    그러니 이 정서는 일본의 현 4~60대 사이의 비밀스러운 공감대인 것이지.
    나는 그 세대도 아닐 뿐더러, 그 문화권에 속하지도 않았으니 진위 여부는 알 수 없겠지만, 고대의 낭만을 함께 품은 세대라고 하면 썩 로맨틱하게 들리지 않던가.

    혹시 모르지. 먼 미래에는 인류를 놓고 이런 공감대를 형성하는 세대가 생길 지도.
    그들의 소설에는 비닐 봉투와 아스팔트 건물이 나오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