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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독

    작업이 장기화되면 어느 순간부터 뭐가 흥미로운 전개인지 잊게 되는 경우가 있다.

    스스로는 길을 잃었다고 표현하는 순간이다.

    이럴 때는 도무지 객관화가 되질 않는다.

    어떤 내용을 쓰고 있고, 또 어떤 전개가 필요한지도 모른 채, 각 편의 의의만을 생각하게 된다.

    이때마다 감각을 되찾고, 제대로 된 방향을 찾기 위해 며칠씩 유예를 들이곤 한다.

    하지만 이때마다 실은 상담을 하면 더 간편하겠다는 생각을 왕왕 한다.

    나 자신의 철학에 위배되는 일이지만, 실제로 그 편이 글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누구에게도 물을 수 없다.

    우선은 나는 내 글을 읽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탓이다.

    그야 많은 사람이 읽지 않고, 내용 또한 기괴하니 감내할 일이다.

    그렇다고 해도, 때때로 고독에 파묻히는 심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도대체 적자를 내며, 실체 없는 독자를 상대로, 몸을 해쳐가며 이런 작업을 계속하는 이유가 뭔가 하고 말이다.

    자기만족이란 자신을 탐구하기 귀찮은 자가 떠올릴 만한 게으른 표현이다.

    우선 이유를 찾자면, 나는 본편에서 내가 살아갈 의미를 찾고 있다.

    집필을 멈춘다면 죽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가장 주요한 이유일 터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나 생에 미련이 많던가?

    그리 생각하면, 내가 이토록 괴로워 하는 이유가 뭔지 또 미궁에 빠진다.

    개인. 개인. 개인. 참 모르겠다. 머리가 어지럽다. 졸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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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도가

    一性圓通一切性

    한 성품이 모든 성품에 원만히 통하고

    一法徧含一切法

    한 법이 두루 모든 법을 품으며

    一月普現一切水

    한 달이 모든 수면의 위에 뜨고

    一切水月一月攝

    모든 수면의 달은 한 달에 수렴하니

    諸佛法身入我性

    온 부처의 법신이 나의 성품에 들어오고

    我性還共如來合

    나의 성품이 다시금 여래와 하나 된다.

    – 증도가(證道歌), 현각(玄覺, 647∼713)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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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키피디아 _ 제11천년기 이후

    ko.wikipedia.org/wiki/%EC%A0%9C11%EC%B2%9C%EB%85%84%EA%B8%B0_%EC%9D%B4%ED%9B%84

    찬란한 저 별들이 힘껏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매마른 대지는 서서히 열사하고

    우주는 반복하지 않고, 세계는 언젠가 없는 것이 될 거란 진실을 외면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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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웹소설의 종교적 색채

    과거 모든 문명권에서 나타난 종교의 원형은 늘 유사성을 띈다.

    하나는 체계화된 도덕의 역할이다. 통치자, 혹은 부모 세대는 종교의 계율을 통해 선한 행위를 가르치려 했다.
    대다수의 율법에서 살인, 절도, 간통 등 범죄를 나열하며 금지하는 문구는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또 하나의 역할은 인간 본연의 두려움을 억제하는 것이다.
    죽음 말이다. 사후세계는 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요소로서 죽음이 끝이 아님을 거듭 강조한다.

    종교의 두 성격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게 된다.
    현재(현세)에서 어떤 행위(선행)을 하면 사후에 보상 받는다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세계관을 띄기 때문이다.

    즉, 종교는 법치주의가 태동하기 이전부터 도덕을 통해 인류 문명을 제어해온 것이다.

    현대에 종교가 세속화되며, 많은 이의 그저 친근한 이웃으로 남은 것에는 이러한 요소가 크게 작용했음이 분명하다.
    유물론이 지배 사상으로 자리 잡고, 수많은 종교의 거짓말이 타파된 지금, 이제 뇌에서 사고가 이뤄진다는 건 일반 상식이다.
    아무리 사후세계를 약속한다 해도, 모든 인간은 내심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다는 걸 이해하고 마는 것이다.
    즉, 보상에 대한 구속력은 약해졌고, 종교는 이미 통제자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많은 종교는 이를 이해하고, 자신의 역할을 그저 선한 조언자로 바꾸게 된 것이다.

    또한 헌신적인 신자가 줄어든 것도 같은 방식으로 설명 가능하다.

    그렇다고 죽음에 대한 공포가 줄었을까? 필시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죽으면 끝이라는 놀랍도록 시시한 깨달음을 강요하는 창작자가 팽배한 이 시대에, 많은 사람은 죽음을 더욱 일상적으로 자주 인지하고 상상하게 된다.

    많은 사람은 여전히 종교의 사후관에 의존하나, 청년 세대의 개인, 비판, 허무주의적 성격은 그런 풍조를 거부한다.
    한편, 나는 웹소설과 종교의 사후관이 많은 면에서 비슷하다는 걸 깨달았다. 공교롭게도 웹소설은 또한 이런 청년 세대가 다수 함유하는 문화이기도 했다.

    이른바 회빙환이라고 부르는 인기 웹소설의 삼요소는 사후관의 일종이다.

    죽었을 때, 과거로 돌아가서 과거의 실패를 바로 잡고, 더 나은 인생을 반복할 수 있다는 회귀.
    또 다른 인물의 몸을 빌려서 여기보다는 더 나은 곳에서 좋은 인생을 살 수 있다는 빙의.
    불교의 용어에서 따왔듯이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의 환생.

    모두의 공통점은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니며, 사후에는 현재보다 나은 삶이 이어질 것이란 내용이다.
    이러한 특성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소설에서도 유행하는 서사로, 그 시작점이 어디였던 간에 국적을 불문하고 매력적이라 느끼는 구조임은 틀림없다. 심지어는 소설을 벗어나 만화, 드라마, 영화 등에서도 이런 플롯이 확산하고 있음은 명백하다.

    종합했을 때, 웹소설의 인기는 그저 유흥 목적에만 있진 않을 것이다.

    누구도 인정하지 않겠지만, 어둡고 괴로운 현실 속에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웹소설은 이미 불안한 청년들을 위한 성경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