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 소리가 시끄럽다는 사실을 너무 일찍 깨달은 탓에 나는 영구적인 불면증을 겪게 되었다.
그리고 선풍기도.
심장 소리가 시끄럽다는 사실을 너무 일찍 깨달은 탓에 나는 영구적인 불면증을 겪게 되었다.
그리고 선풍기도.
누군가 보는 일기를 쓴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기분이다.
보여주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고, 숨길 방법이야 많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이는 푸주한의 사명이다.
일찍이 나는 나 자신의 토막내어 시장에 전시해 두지 않았던가.
비록 섬세하지는 않더라도 단호하게, 일말의 동정심도 없이 기계적인 동작을 수행해, 248조각으로 등분하여 지금도 자랑스레 고리에 걸어 전시해 두고 있지 않던가.
신선한 고기는 푸주한의 자부심이고, 팔리는 것은 기쁨이어야 한다.
때문에, 나는 속살을 드러내는 데에 거부감을 품어서는 안될 노릇이다.
(거부감은 기쁨에 상반된 감정이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는 것보다 공격적인 행위가 있을까?
(폭력이나 욕설 등의 반사회적이지 않은 행위에 한하여)
이는 나만의 생각도 아니고, 또한 참신하거나 새로운 관점도 아니다.
작은 사회에서는 가십(뒷담)과 같은 형태로 나타나고, 큰 사회에서는 정치의 형태로 나타난다. 둘 모두 여지없이 폭력적이라는 사실에 반박할 사람은 드물 테지.
하지만 이것은 사회에 국한된다. 밀란 쿤데라는, 모든 도덕적 판단을 중지하는 것이야말로 소설의 도덕이라 주장했다. 문학의 세계에서는 윤리적 자태는 의미가 없기에, 한없이 창발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즉, 문학을 하며, 사회를 살아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도덕적으로도 옳지 못하며, 성립할 수도 없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고 또.
버들나무의 잎사귀.
피츠제럴드는 돈을 위해 글을 썼다.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그는 할리우드에서 글을 썼다. 그리고 아주 많은 작품을, 단편들을 돈을 받고 써냈다. 이 때문에, 피츠제럴드는 항상 평가절하당했다. 하지만 사실은 어떤가? 문학이 돈과 분리되었던 시대가 진정 있기는 한가? 실로 기이하다. 자기완결을 위해 일생을 바친 극소수의 기인이 만들어낸 이미지에, 문학의 실체는 완전히 부정당해, 질식되어 소멸하고 만 것이다. 심지어 이 허무맹랑한 신기루에 홀려, 지금 같은 시대에도 수많은 젊음이 비실존하는 문학을 향해 허망한 투신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운 좋게도 나는 그 역학을 벗어났다. 해답 없는 탐미주의와 자아실현의 몽상에서 빠져나와, 오직 돈을 위한 글을 쓰게 된 것이다. 이는 내 경력이 일천하여 어떤 허물을 쓰는 데도 거부감이 없었기 때문이고(꽤 나중에 알았지만, 이것은 꽤 주요한 소질이었다.), 또 천만다행하게도 사람들이 사주는 글을 쓰는 법을 익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가장 주된 이유를 말하자면, 내게 아주 많은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그래서 지금은 어떠한가? 내 것이 아닌 채무는 끝났고, 나는 본디 그런 거금을 원치 않는다. (이 점에 한해서는 피츠제럴드보다 운이 좋다고 할 수 있겠지.) 긴 세월 억눌렸던 자아는 다시금 실존하지 않는 신기루(자아 실현, 작품, 문학)를 향해 나아갈 것을 호소한다. 밤마다 문호들(헤밍웨이, 도스토프옙스키, 미시마 유키오)의 허깨비가 내게 다가와 손을 내민다. 완전히 미친 짓이다. 하물며 나는 이제 젊지도, 진정 열의를 담아낼 글(신기루)을 쓸 수도 없을 뿐더러, 쓰길 원하는 지조차 알지 못한다.
피츠제럴드는 돈을 위해 글을 썼다.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어찌 그랬을까.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텍스트라는 무대 위에는 각광이 없다. 텍스트 뒤에 능동적인 누군가(작가)가 있고, 그 앞에 수동적인 누군가(독자)가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주체와 객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어느 극단적인 작가(Angelus Silesius)가 묘사한 ‘구분할 수 없는 시선’과 같다: “내가 하느님을 보는 눈은, 하느님이 나를 보는 눈과 같다.”
– 텍스트의 즐거움, 롤랑 바르트 저 中 –
그간 집필 활동을 하며 견지해 온 입장이 있습니다. 독자는 작가를 알아서는 안 되고, 알게 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자명합니다. 제가 쓰고 있는 글은, 저라는 인물의 사상이나 이념을 풀어내는 수단이 아니라,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즐거움에 조금이라도 악영향을 줄 만한 것이라면, 배제하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지극히 상식적이고, 논리적인 대응인 셈입니다.
한편, 그와 상반된 정서가 제 안에 존재합니다. 저는 이것을 책임감이라 부르고 있지만, 실제로는 추한 과시 욕구, 인정 욕구의 발로인지도 모릅니다. (프로이트라면 틀림없이 성기와 유년기의 왜곡된 트라우마 따위로 비유했을 법한 그런 것)
어쨌거나, 저는 작가는 독자로부터 숨어야 한다 믿는 동시에, 쓰고 있는 글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모순을 믿습니다.
이 상반된 견해를 소화하기 위해 긴 세월을 고심했지만, 여전히 저는 답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다만, 제가 답변을 유예하는 동안, 제가 집필 자체를 멈췄다고 생각하고 계신 독자분들이 많다는 것도 보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들을 위해, 저는 위에서 말한 책임을 지고자 합니다. 일단, 저는 창작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다만, 그 형태가 모두가 기대하던 형태는 아닐 것입니다. – 적어도 한동안은 그럴 것입니다.
저는 잠시 쉼표를 찍어두고자 합니다. 이런 소극적인 형태의 답변이 모두에게, 아니, 단 한 명이라도 만족할 답변이 될지는 몰라도.
과연 바람이 불까요? 저는 그랬으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