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덩어리

    어릴 적부터, 나는 멈춰 있는 세상을 본 적이 없었다. 벽은 쉼 없이 꿈틀거렸고, 천장에는 길게 이어진 검은 덩어리가 내려왔다 올라갔다를 반복했다. 온 세상은 검은 것으로 도배되어 있었고, 운이 좋아야만 간신히 그 사이로 사물의 원형을 볼 수 있었다.

    “색맹인 것 같습니다.”

    의사가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나는 색깔을 볼 수 없는 게 아니었다. 그저 세상이 검은색으로 뒤덮여 있을 뿐이었다. 아이에 불과했던 내 빈약한 표현력으로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었고, 나는 전색맹 판정을 받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부모님은 의사의 말을 믿었다. 색맹을 위한 그림책을 사주거나 했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내가 그것을 전혀 보지 못하자, 내가 겪고 있는 증상이 색맹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을 펴면 처음 몇 초 동안에는 그것을 볼 수 있었지만, 곧 검은 것들이 우글거리며 그 위를 뒤덮었다.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물의 윤곽선뿐이었다.

    나는 여러 병원을 다녔다. 눈은 물론 뇌 검사도 받았다. 그렇지만 어느 큰 병원도 마땅한 답을 내지 못하자, 우리는 서서히 그것을 받아들이게 됐다. 내가 남들보다 조금 불행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우리 가족은 내 삶을 이해하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부모님은 내가 책이나 텔레비전을 볼 시간에 운동을 하고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해줬다.

    시간은 흘렀고,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남들과 조금 다른 점 때문에 나는 좀처럼 남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친구들은 모두 비슷한 키였기 때문에 심지어 나는 그들을 구분하지도 못했다. 아이들은 내가 보고 있는 검고 우글거리는 덩어리에 대해 이해하지도 못했고, 나는 그것을 설명하는 것을 관뒀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돌아오니 부모님이 먼저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가방만 방에 두고 곧바로 차에 타 어디론가 실려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자, 어머니는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고 말했다. 시골에 사시는 외할머니가 위독하다는 것이다. 나는 창문이 닫힌 채로는 검은 것 때문에 밖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창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봤다. 옆을 지나가는 차 위에 얹어져 있던 검은 것들이 뒤로 날아가고 있었다. 마치 자동차 뒤로 검은 끈이 생긴 것 같았다. 도로와, 저 멀리 보이는 산은 쉴 새 없이 꿈틀거렸다. 나는 2시간 동안 그 꿈틀거림을 멍하니 바라봤다.

    병원에 도착한 우리는 중환자실로 이동했다. 복도를 걷던 나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누군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나는 불안해져 주변을 둘러봤지만, 그 소리를 들은 것은 나뿐인지 주변의 누구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무서워져 어머니의 손을 꼭 쥐었다. 어머니는 오해했는지 “할머니는 괜찮을 거야.” 하고 나를 위로해줬다.

    할머니라고 하는 검은 덩어리는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그녀의 주변에는 무언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지만, 나는 그것들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의료 기구일 것이라 추측했다. 의사가 부모님을 향해 마음의 준비를 할 것을 권했다.

    그 순간, 나는 이상한 것을 보았다. 할머니가 누워 있던 자리에, 한 늙은 여인이 나타난 것이었다. 내가 태어나서 본 것 중에 유일하게 검은 것에 뒤덮이지 않은 그녀는, 내가 오직 책에서만 볼 수 있었던 온전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우리를 바라보더니 비명을 질렀다. 검은 것들이 그녀의 다리를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여인이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는 동안에도 그것들은 착실히 그녀의 몸을 뒤덮었다. 그리고 입으로, 귀로, 코로, 모든 구멍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더니 내게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여인은 점점 작아지기 시작하더니, 머지않아 그녀가 서 있던 자리에는 정적만이 남았다.

    “임종하셨습니다.”

    의사가 말했다.

    “좋은 곳에 가셨을 거야.”

    아버지가 말했다.

    “아빠가, 사람이 죽으면 사후 세계로 간대.”

    그 아이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사후 세계에는 뭐가 있을까?”

    “개미.”

    내 눈에 담긴 두려움을 본 걸까. 그 아이는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난 죽지 않을래.”

    나는 슬픈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누구도 그럴 수 없어.”

    옛날에 썼던 것.

    무서워.

  • ,

    누나 外

    누나가 거북을 데려왔다.
    죽지 않으니 내게 알맞다고 한다.
    누나는 거북보다 일찍 죽었다.



    진동하는 별의 소리에 놀라 깨었다.
    울음, 웃는 건 확실히 아니고.
    다시 들으니 역시 우는 게 맞았다.



    어깨가 들썩거린다.
    심장이 뛸 때마다 그랬다.
    고동과 고통은 닮았다.

    개미는 시체를 먹고 산다.
    누가 죽어야 개미가 사는 것이다.
    우리 할머니도 반쯤은 개미다.

  • ,

    누나

    어제 누나가 죽었다. 자살이었다.

    알게 된 것은 오늘 새벽이었지만, 정확히 언제쯤 죽었는지 알지 못했다. 경찰관도, 부검의도 알려주지 않았다. 

    가족이 죽었다. 자살이었다.

    알게 된 것은 어제였지만, 정확히 언제쯤 죽었는지 알지 못했다. 말하지 않은 건 실수인 듯했지만 물어보면 괜히 상대를 지적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하지 않았다. 그건 내 잘못이었다. 상주로서 수 차례 물어보는 질문 중 가장 곤란한 것이 언제 가족분이 별세했는지였다. 그때마다 나는 아홉 시에 죽었다, 열두시에 죽었다 등등 되는 대로 대답해서, 가족은 온종일 자살하는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지금은 관 속에 있을 가족의 모습을 영정으로 엿볼 때마다 질투가 치솟았다. 아마 먼저 죽는 건 내가 될 줄 알았는데, 선수를 빼앗긴 것이다. 그 때문에 죽은 사람은 편하게 누워 있는 동안, 나는 혼자서 복잡한 장례 절차나 행정 업무를 다 도맡아야 했다. 소리를 질러도 평소처럼 고함으로 돌아오거나 하지 않아서 나만 멀뚱히 바보처럼 보이게 되었다.

    별로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이상하게도 부고를 들었을 때 눈물이 났다.

  • ,

    나무에서 머리가 자란 날 外

    나무에서 머리가 자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떡잎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영락없이 머리다. 태아처럼 투명하고 만지면 푸욱 꺼지는 부드러운 머리였는데, 점점 커지더니 머리카락이 자라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은 검은색이었는데, 머리카락이 까슬 거리는 직모라 쓰다듬으면 찔리고 말았다. 찔린 자리에서 피가 나길래 만지는 것은 그만뒀다.

    눈꺼풀은 있었는데 언제나 감고 있어서 눈알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열어젖힌다면 확인은 할 수 있겠지만, 내 모습을 보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나는 언제든 나무가 나를 엿볼 수 있겠다 싶어서 불을 끄고 커튼을 쳤다. 귀도 있었는데 나는 그것이 꼭 필요한지는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무도 노래를 들으면 잘 자란다는데, 그렇다면 귀를 달 것도 없이 소리를 들을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나는 원예가가 아니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입이었다. 머리는 가끔씩 우물거리기도 하고, 혀를 내밀기도 하고, 목소리도 왕왕 냈다.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걸까 싶어서 귀를 들이밀었더니 그대로 귀를 물렸다. 귓바퀴에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머리는 계속해서 커지더니 어느새, 내 머리보다 조금 더 큰 것이 되었다. 어디까지 자라나 계속 보고 있었더니 갑자기 말하기 시작했다.

    “고마워요.”

    나는 기분 나빠져서 나무를 베어버렸다.

    아기는 섭씨 15도에서 25도 안팎의 온도에서 태어난다. 습도는 60%가 적당하며, 시간은 해가 진 뒤가 적당하다. 여름에는 주로 22시에서 2시 사이이며, 겨울에는 18시에서 24시 사이이다. 갓 태어난 아기는 피부가 건조하니 따뜻한 물로 적신 수건으로 덮어주는 것이 좋다. 아기는 종종 물에서 태어나는데, 이 경우 재빠르게 건져줘야 한다. 아기는 태어나면서부터 헤엄을 칠 줄 알기 때문에 개인차가 있으나 10분에서 20분 사이는 물에 방치 해도 문제없다. 주변에 뜨거운 물건이 있는지 신경 쓰는 것이 좋다. 갓 태어난 아기가 다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거울 속에 검은 상복을 입은 내 모습.

    너무 아름다워 몇 시간이나 쳐다보고 말았다.

    관에 누워있는 누군가는 한없이 나를 기다린다.

  • ,

    어느 지역에서는 비 대신 생선이 내린다고 한다.

    어느 지역에서는 비 대신 생선이 내린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듣고 나는 ‘세상에는 별 신기한 일이 다 있구나.’ 하고 생각하고 말았다. 그렇게 신기한 생선비에 대해 잊어가던 나날, 어느 다른 기사에서 이런 내용을 봤다.

    <생선은 잠들면 머리를 아래로 하고 가라앉는다.>

    그걸 보고 나는 깜짝 놀라서 깨달았다. 바다의 밑바닥과 하늘의 천장은 닿아 있는 게 아닐까, 나는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기상청에 전화했다.

    “저기, 죄송한데, 혹시 하늘 위에는 뭐가 있나요?”
    “하늘이라면 어느 정도 높이를 말씀하시는 거죠?”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니 하늘이라고 해도 이것저것 있을 것 아닌가. 나는 전화를 끊고 도서관에 가서 하늘에 대한 책을 빌려왔다.

    그냥 하늘이라고 퉁쳐서 생각했었지만, 실은 하늘은 아주 많은 권역으로 나눠져 있었다. 대류권, 성층권, 중간권, 열권, 외기권, 그리고 우주까지.

    ‘우주도 하늘이구나.’

    나는 처음 안 사실에 순수하게 감탄하며 읽다가, 원 목표를 기억해내며 급히 찾아봤다.

  • ,

    연재 중단 후기

    <좀비가 한 명밖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는 2019년 브릿G 좀비 문학 장편 소설 부문에 제출하기 위해서, 대략 2주 정도 동안 준비했던 장편 소설이다. 당시에는 거의 일일연재의 추세로 연재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중학교 이후로 처음 써본 장편 소설이라서 그럴까, 아무래도 사이트 내에서 반응이 좋지 않아서 수상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연재를 멈췄었다. (최신화는커녕 몇 편간 조회수 0회!)

    나 개인의 평가는 어떤가 하면은, 사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정말 재밌는 글이다. 이어질 내용은 더욱 흥미진진하겠지. 하지만 내가 대중적인 취향에서 괴리되었다는 것만 통감할 뿐이었다….

    언젠가 마저 쓸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솔직히 이만큼 재밌는 글이었으니까, 성실하게 완결을 냈다면 동상이나 은상 하나쯤은 손에 쥐어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아무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를 쓸 수 있는 건 역시 나밖에 없구나 하는 감상도 좀 들고, 이런 글을 다시 이어서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좀 들고.

    생각보다 별로 할 말이 없네요.

    유감천만.

  • ,

    김하나 – 외래종(1)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소원이 이뤄지면, 의외로 무섭다는 생각이 먼저 들더라고요. 제 경우엔 유진이가 죽었을 때 그랬어요. 틀림없이 기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라고요. 심지어 ‘내가 죽였나?’ 같은 이상한 망상까지 떠올랐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제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야기를 듣고 나면, 아마 평범하게 납득하실 거예요. 제가 그 아이가 죽길 바란 게 그리 이상한 게 아니란 걸요. 우선 그날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유진이가 죽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사건 다음 날이었습니다. 새벽 내내 사건에 대한 보도가 이어졌다고 하는데, 부모님은 저녁 뉴스를 보지 않으시고, 저도 뉴스라고는 포털 사이트 메인을 훑는 정도가 다였기 때문에 우리 가족 중 누구도 사건에 대해서 몰랐습니다. 그만큼 사건은 조용하고 빠르게 마무리됐어요. 같은 반이 아니었다면 끝내 눈치채지 못했을지도 모를 정도로요. 지금은 수시로 인터넷 뉴스를 확인하는데, 그건 그날 이후로 생긴 버릇이에요. 더 이상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불안해서 견딜 수 없는 거죠. 일종의 흉터 같은 거라 생각해요. 하여튼, 다음 날도 저는 평범하게 등교했고, 사건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아침 조례 시간이었습니다.

    그날은 아침부터 뭔가 달랐어요. 시끄럽게 떠드는 것도 아니고, 조용히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사방에서 속닥거리는 소리만 들렸어요. 다들 죄라도 지은 것처럼 불안해했어요. 나중에 알았지만, 그 시점에 그 아이 책상은 이미 치워졌는데, 저는 그것도 눈치채지 못한 거예요. 저는 그냥 그때, 문제집을 풀었을 거예요. 굳이 신경 쓸 정도의 일은 아무것도 없었던 거예요.

    우리 반의 조례는 다른 반보다 늦게 시작했어요. 담임선생님이 반에 들어오는 걸 굉장히 싫어했거든요. 그래서 아침 자습이 끝나고 5분 정도 지나야 시작했고, 그마저도 하지 않아 반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더 많았어요. 그렇지만 그날은 조금 달랐어요. 조례 시간까지 앞으로 10분은 남았는데, 선생님이 들어왔습니다. 선생님은 기분 나쁠 정도로 들떠 있었습니다. 언제나처럼 힘없는 발걸음 대신에 경쾌한 스탭으로 성큼성큼 교단으로 올라갔어요. 그리고 안 어울릴 정도로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어제저녁에, 다들 뉴스는 봤겠지만.”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요. 저는 막 풀리려고 하는 수학 문제와 선생님이 언제나 하는 시답잖은 이야기 사이에서 갈등했습니다. 보통은 전자를 선택하는데, 그날은 조금 달랐습니다. 낮은 목소리로 속닥거리던 학생들이 일제히 정면을 바라봤습니다. 지금까지 반이 이렇게 조용한 적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의 정적이 흘렀습니다. 그런 흐름이었기에 저는 영문도 모른 채, 연필을 내려놓고 마지못해 선생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우리 반에서 좀비 바이러스 감염자가 발생했다. 누군지는 굳이 말하지 않겠지만….”

    선생님의 시선이 빈 공간으로 향했습니다. 네, 빈 공간이요. 학생들도 따라서 선생님의 시선 끝을 쫓았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가 너무 충격적이라, 비어 있는 곳이 누구의 자리가 있던 곳인지조차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정유진의 자리가 있던 곳이었죠.

    “우리나라는 좀비 바이러스 안전지대라고 착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 바이러스란 살아 있는 생물처럼 교묘해서, 조그만 빈틈에도 기민하게 반응해 들어오거든. 저 영국을 봐라, 선진국이니까 안전하다고 생각했지만 얼마나 사회가 망가졌는지. 그런데 한국은 아직도 개발도상국이나 다름없단 말이야. 그런데 한국은 바이러스가 침투하지 못했잖아. 뭐가 다른가 하면 국민성의 차이 때문이겠지. 영국인들은 어릴 적부터 자기 멋대로 살도록 배운다는데, 부모님도 아이를 그냥 방치하는 거야. 그래서 자립심을 키운다는 거지. 그러니까 제멋대로 행동하는 아이들을 통해 바이러스가 퍼지고 사회가 망가지는 거지.”

    선생님은 충격을 다스릴 시간도 주지 않고 신나서 말을 이어갔습니다.

    “바이러스가 침투할 수 없는 건강한 사회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면, 역시 조화를 이뤄야 하는 법인데, 이 조화란 게 단순히 조화롭게 살고 그런 얘기가 아니라, 사람이 제자리에서 제 역할을 해줘야 그제서야 사회가 조화롭게 돌아간다고 하는 거야. 어릴 적에 개미 집을 부숴본 경험은 다들 있지? 그렇지만 나는 안 그랬어. 대신에 그냥 개미가 어떻게 먹이를 나르고, 어떻게 행동하는지 바라본 거야. 왜냐? 내가 끼어들면 그 사회의 조화가 깨진다는 걸 알았거든. 정유진이 내 반만큼만 했어도 바이러스에 걸리진 않았을 건데.”

    마침내 선생님의 입에서 이름이 거론됐지만 누구도 놀라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때 이미 모두가 알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챘습니다. 여기서 아무것도 모르는 건 저뿐이었던 거죠. 저는 그 이름에 혼자 깜짝 놀랐습니다. 마음속에 그림자가 드리웠습니다. 죽는 방법이 너무 극적이었기 때문일까요? 평범하게 자살이나 교통사고로 죽었다면 저는 기뻐했을지도 몰라도. 하지만 좀비 바이러스라뇨.

    아직까진 제가 왜 유진이가 죽길 바랐는지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르겠네요. 그걸 설명하려면 조금 더 복잡해지니, 우선 조금 더 옛날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저와 유진이 다니던 K 고등학교에 대해 설명하는 게 먼저겠네요. K 고등학교는 30년 이상 된 남자 고등학교였습니다. 남녀 공학으로 바뀐 것은 제가 입학하기 고작 몇 년 전이었고요. 그래서인지 지역 내에서는 남자는 K 고, 여자는 K 여고라는 편견이 만연해 있어서, K 고는 공학 학교임에도 여학생이 매우 적었습니다. 저는 여학생이 적은 만큼 쉽게 뭉칠 거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반대였습니다. 밉보이면 끝이었습니다.

    저는 어른들은 학생이 얼마나 잔인한지 모른다고 생각해요. 그런 만큼 상황을 쉽게 낙관하고, 학생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죠. 한때 그들도 학생이었을 텐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시간이 흐르는 만큼, 기억과 타협하기 때문일까요. 아무튼, 학생들은 빠르게 계급을 나눴어요. 중심은 언제나 K 중학교 출신 여학생들이었어요. 가장 수가 많았고, 대부분 서로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 아이들은 입학식 날부터 소란스럽게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껴안았습니다. 저에겐 그 행동은 정말로 반가워서 그렇다기보다, 다른 학생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처럼 보였어요. 실제로 타 학교 출신들이 안절부절하기 시작했으니까요.

    눈치 빠른 타 학교 출신들은 첫날부터 K 중학교 그룹에 끼기 위해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습니다. 빠르게도 계급이 나뉜 거죠. 그 아이들은 잘 어울린 것 같다가도, 모르는 이름이 화제에 떠오를 때마다 어색하게 웃었습니다. 그 이야기에 끼지 못하는 한, 영원히 간극은 좁혀지지 않을 거라는 경고 같은 게 아니었을까요?

    반면, 그런 아이들에 비해 둔한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타 학교 출신이면서도 그룹에 끼기 위해 노력하거나, 아첨하지도 않고, 그저 상황을 낙관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아이들은 머지않아 타겟으로 찍히더라고요. 우습게도 괴롭힘을 주도하는 건, 이미 그룹에 들어간 타 학교 출신들이었습니다. 누군가를 괴롭히면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겠죠.

    저는 어느 쪽인가 하면 외래종이었습니다. 타 학교 출신이면서, 눈치가 느리지도 않고, 그렇지만 그룹에 끼기 위해 아첨하지도 않았으니까요. 우점종에게는 생태계를 망칠 수도 있는 경계 대상처럼 보였겠죠. 우점종이요? 물론 K 중학교 출신 여학생들이죠. 저는 K 고가 순전히 공부에 집중하기 좋은 환경이라는 얘기를 듣고 입학했기 때문에 그런 배타적인 분위기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저는 자연스럽게 고립됐습니다. 그렇지만 괴롭힘을 당하진 않았어요. 공부를 잘했기 때문이죠. 그냥 잘하는 수준이 아니라, 반에서 가장 잘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남았습니다. 제 안에 품은 독을 여과없이 드러내면서 말이죠. 아이들은 모르는 문제가 있으면 저에게 가져왔고 저는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공식을 풀어줬습니다. 그러니 누구도 저를 건드릴 수 없는 거죠.

    몇 주가 지나니 반의 생태계가 윤곽을 드러냈습니다. 그룹에 들어간 아이들과, 그렇지 못한 아이, 포식자와 피식자. 같은 반에 있더라도 남학생들은 몰라요. 걔네는 때리는 것만이 괴롭힘의 전부라고 믿으니까요. 오로지 저희만 알아볼 수 있는 은밀한 괴롭힘이 이어졌습니다. 그런 와중에 저는 반에 저 말고 또 다른 외래종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으면서 어떤 괴롭힘도 받지 않는 아이. 신예리라는 아이였어요. 저는 그 아이가 어떤 독을 품고 있을지 궁금해졌습니다.

  • ,

    박서한 – 은인

    그때가 아마 밤 11시, 12시쯤이었을 거예요. 저는 런닝을 하고 있었어요. 형에게 수험은 체력 싸움이라는 얘기를 계속 들어와서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야자가 끝나면 언제나 런닝을 했거든요.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집 근처 산책로를 달리고 있었는데 형한테 전화가 오더라고요. 빨리 집으로 돌아오라고, 난리가 났다고요. 그러면서 뉴스를 확인하라길래, 저는 핸드폰으로 뉴스를 봤어요. 정말로 난리가 났더라고요. 한국 최초의 좀비 바이러스 감염자 발생이라고, 그때는 우리 시 이름만 나와 있어서 저는 진짜 큰일 났다 싶어서 바로 집으로 돌아갔죠.

    집에 돌아갔더니, 의외로 부모님은 담담하더라고요. 저는 당장 피난 준비라도 할 줄 알았는데. 저하고 형이 불안해하는 와중에, 상황은 척척 정리되더라고요. 1시간 뒤에 죽은 사람이 우리 학교 학생이라는 게 밝혀졌어요. 그리고 또 1시간 지나니까 사진과 이름이 나오더라고요. 정유진이 죽었다는 건 그 때 처음 알았어요. 의외로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더라고요. 학교라도 쉴 줄 알았는데, 다음 날도 정상 등교했고요.

    딱 하나 바뀐 것이 있었다면, 원래 정유진이 앉았던 책상과 의자를 치웠다고 하더라고요. 정유진이랑은 다른 반이었어서 쉬는 시간에 가봤는데, 그, 사람이 죽으면 영화 같은 거 보면 국화꽃이 들어 있는 꽃병이라던가 올려놓잖아요? 그것도 없이 그냥 비어 있더라고요.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그 반에는 쉬는 시간마다 구경하러 온 애들이 몰려들었는데, 심지어 저학년 학생들도 지나가는 척 힐끔힐끔 엿보더라고요. 그래서 그날은 선생님들이 번갈아 가면서 반 앞에 서서 학생들을 쫓아냈어요.

    아까 비어 있다고 말했잖아요, 그건 말 그대로예요. 밖에는 구경하러 온 학생들이 계속 왔다갔다하며 소란스러운데, 웃기는 게 같은 반 학생들은 정말 아무 반응도 없더라고요. 처음에는 반을 잘못 찾아온 줄 알았어요. 반에 들어가서 애들한테 말을 걸어도 그냥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면, 걔네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예요. 누군가 죽는다면 정유진이 죽을 거라고. 그냥 형태가 조금 예상 밖이었을 뿐이었던 거예요.

    정유진이랑은 2학년 때 같은 반이었어요. 어, 좀 이상한 애였어요. 신문이나 뉴스 보니까, 공부를 잘하고 단정한 모범생이라고 나왔는데, 저는 걔가 공부를 잘하는 줄도 몰랐어요. 아무도 그런 말은 안 했고, 애도 좀 띨빵하게 생기고 어리버리 해서 당연히 공부는 못할 줄 알았어요. 어디서 들으셨는지 몰라도, 걔랑 사귄 적이 있느냐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개는 남친은 커녕 친구도 없었어요. 쉬는 시간에는 안 자는 거 뻔히 아는데 엎드려서 자는 척하더라고요.

    직접 괴롭히는 걸 본 적은 없는데, 걔가 여자들한테 찍힌 건 사실이에요. 보통은 아예 관심 자체를 안 줬는데, 가끔 지나가면서 걔 들으라고 욕하고 지나가고 하더라고요. 별명이 개미인가, 그랬을 거예요. 1학년 때, 어떤 선생이 그렇게 불러서 굳혀졌다고 하는데 진짜 개또라이죠. 하여튼 여자애들이 다 정유진을 싫어하니까 남자애들도 싫어했어요. 계기는 딱히 없었는데, 예쁜 것도 아니고, 애도 좀 이상하고 하니까 다들 그냥 자연스럽게 싫어했죠.

    그러다가 제가 걔랑 조금 친해진 건 사실이에요. 같은 반 학생인데 불쌍하기도 하고 그래서요. 제가 이런 말은 좀 자뻑 같아서 하기 싫었는데, 솔직히 이건 칭찬받아야 하는 거예요. 알잖아요, 걔는 왕딴데, 걔랑 친해지면 괜히 저만 손해 보는 거. 그런데 저는 도와준 거라니까요?

    잤냐고요? 서로 동의했어요. 요즘 애들은 뭐 하는지 다 알아요. 피임도 제대로 했고요. 물론 학생 신분인 만큼 서로 조금 더 신중했어야 했다는 건 알아요, 그건 제 잘못이 맞고요. 그렇지만 문제 될 건 아무것도 없잖아요. 지금 왕따랑 잤다고 뭐라 하시는 거면 곤란한 게, 그런 못생긴 애랑 자줬는데 오히려 걔가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저하고 조금 말하고 놀고 하다 보니까, 다른 남자애들이랑도 자연스럽게 친해지더라고요. 쉬는 시간에도 자는 척 안하고요. 이제 아마 아셨을 건데, 이제 와서 제가 걔랑 잤고 어쩄고 하는 게 밝혀져도 저는 문제 될 게 하나도 없어요. 오히려 걔나 걔 부모님한테만 문제 될 걸요. 지금은 무슨 피해자인 것처럼 나오는데 어이가 없더라고요. 왜냐고요? 진짜 이거는 제가 정유진 이미지 생각해서 말 안하고 다닌 건데, 걔 남자 엄청 밝혔어요. 다른 남자들이랑도 잤을 걸요?

    제가 보기에 그 때, 반에 있던 남자들은 대부분 정유진이랑 잤을 거예요. 알잖아요, 사춘기 남자들은 자라고 하면 지 엄마뻘이랑도 잘 애들인 거. 강요 같은 건 안 했어요. 그러면 강간이잖아요. 오히려 걔가 적극적으로 꼬시고 다녔다니까요. 우리가 걔를 뭐라고 불렀는지 알아요? 여왕개미예요, 여왕개미.

    저기요, 저 진짜 대학 들어오고 집중해야 하는 시기예요. 공부도 그렇고, 여자도 만나고 해야는데 이제 와서 몇 년 전에 죽은 애랑 잤고 어쩌고 하는 걸 추궁하셔도 되게 곤란해요. 청춘이란 게 다 그런 법이잖아요. 남들은 술 한잔으로 흘린다는데 왜 저만 운이 없어서 그러는지 모르겠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안 도와줄 걸 하는 생각도 다 들고 그래요.

  • ,

    신예리 – 동물 시체에서 사는 아이(3)

    정유진에게 불쾌한 편지를 몇 통 받은 것만 뺀다면 중학교 시절 3년을 나는 즐겁게 보냈다. 그 때문에, 나는 유진이를 거의 잊고 지냈고 무심코 K 고등학교를 1지망으로 제출하고 말았다. 집이 가까운 만큼 나는 높은 우선순위를 받아 간단히 입학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실수였던 것이다. 당연히 옆집에 사는 유진이도 K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나는 다시 3년간 정유진의 죄수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걱정과 별개로, 나는 새로운 학교에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도 있었다. 학교가 다시 중학교와 다시 멀어진 탓에, 내가 사귄 새로운 친구들은 대부분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했고, K 고등학교에는 아는 사람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아직도 이런 학생다운 감정이 남아 있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그런 걱정은 다행히 기우로 끝났다. 입학식 날, 불안한 마음으로 등교한 나를 초등학교 동창들이 알아본 것이었다. 다행히 나를 좋게 기억해 줬는지, 3년간의 공백은 없었다는 듯한 반응이었지만 나는 그룹마다 본 적 없는 아이들이 끼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중학교 공백은 분명히 존재했던 것이다. 나는 그 아이들의 경고를 충분히 이해했다. 아는 척 해줬다고 눈치 없이 친구인 양 행세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번갈아가며 초등학교 동창 애들을 만났는데, 어느 그룹에도 유진이 없다는 걸 알았다. 입학식 행사 내내, 나는 무의식적으로 유진을 찾았는데, 그 아이와 만난 것은 행사가 다 끝난 뒤, 교문 앞에서였다.

    3년만에 만난 유진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초라했다. 그래도 어릴 적에는 나름 볼살이 귀여웠는데 지금은 양 뺨이 쏙 들어가 그저 메말랐고, 키는 조금 컸지만 팔다리가 너무 얇아 나뭇가지 같았다. 무엇보다 앞을 보고 걷는 법을 모르는 것처럼 푹 숙인 고개가 한심해 보였다. 그 아이가 그런 모습으로 내게 다가오자, 나는 무심코 내가 아닌 내 뒤에 있는 누군가를 본 것이기를 바랐다. 불행하게도 그 아이는 정확히 내 앞에 멈춰서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러자 작은 입의 안쪽으로 덧니가 보였다.

    “예리야, 오랜만이야! 너 하나도 안 변했구나!”

    그리고 목소리는 또 어찌나 큰지. 사람과 대화하기 딱 맞는 목소리를 모르는 게 분명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며칠 동안 다른 사람과 대화한 적이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지나가는 학생들이 우리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기억 안 나? 나야! 옆집 사는 정유진! 우리 어릴 적에 단짝이었잖아!”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유진은 무엇이 그리 급한지 다급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이 멍청한 아이는 진심으로 내가 자기를 까먹었을 거라 믿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여전히 지나치게 목소리가 컸다. 학생들은 제 갈 길을 가며 우리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호기심이 아니란 것을 눈치챘다. 그 아이들은 유진이 아닌 내 쪽을 보며 조롱 섞인 평가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정유진의 의도가 이해가 됐다. 그 아이는 자신에게 친구가 있다는 것을 주변에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어떤 대우를 받을지 생각도 못한 채로 저 혼자 절박하게 살아남으려고 한 것이다. 어릴 적이랑 똑같았다.

    “미안한데 나한테 아는 척하지 않아 줬으면 좋겠어.”

    내가 말했다. 생각보다 차가운 목소리가 나와 놀랐지만, 그 정도가 딱 좋았다. 그러자 유진은 예상도 못했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나는 그게 연기인지, 아니면 정말로 의외라고 생각한 것인지 몰랐다.

    “예리야, 왜 그래? 내가 뭐 잘못했어?”

    “너랑 얘기하는 거 부끄러우니까.”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자리를 떠났다. 유진은 대답하지도, 나를 쫓아오지도 않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에게 괜찮다고 말하며 옷에 개미 시체를 문지르던 유진은 이미 없었던 것이다. 그 아이는 이미 실패를 만나면 체념하는 것이 버릇이 든 것이다. 뒤쪽에서 다른 학생들이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말한 것이 정답이었는지, 다음 날부터 나는 아무 문제 없이 새 친구들을 사귀고 그룹에 들어갈 수 있었다. 유진과는 다른 반이 되었다. 그렇게 3학년까지 정유진과 다시 만나는 일은 없었다.

    그렇지만 여학생들과 어울리지 못했기 때문일까, 그게 정말 좋은 생각이라고 여겼는지 몰라도, 2학년쯤부터 유진이 남학생들과 어울린다는 안 좋은 소문이 간간이 들려왔다. 처음에는 헛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 아이에게는 여성적인 매력이 전혀 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없었으니까. 나는 순진하게도 여성을 파는 것에도 조건 같은 것이 필요하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자신감 없고 못 생긴 아이를 남학생들이라고 좋아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내 예상과 달리 소문은 날이 갈수록 살이 붙었다. 그 아이가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소문까지 이르러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남자는 내 생각보다 멍청한 건가. 나는 별 관심 없었지만, 유진이가 남자와 사귄다는 이야기는 친구들 사이에 큰 화제가 되었다. 왕따와 사귀는 멍청한 남자가 누군지 다들 궁금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시점부터 더 들려오는 소문이 없자, 친구들은 금방 다른 화제로 넘어가게 됐다. 나는 고작 옆 반의 일인데 소문이 끊긴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 진상을 알게 된 것은 한참 나중이었다.

    아, 정유진은 남자친구를 사귄 적이 있다. 유진이가 죽은 뒤에 나는 당연히 기자들이 그 남자애를 찾아갈 거라 생각했는데, 별 관계도 없는 나만이 이상할 정도로 표적이 되었다. 뭔가 이상해서 찾아보니, 그 아이가 남자친구가 있었다는 내용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마도 그 남자애가 주변에 비밀을 지켜달라고 부탁한 것일 터다. 그 둘의 교제는 애초에 그리 건전한 연애가 아니었으니까, 교사들이나 관계없는 학생들은 몰랐을 것이다. 부디 박서한, 그 좆같은 강간범 새끼를 찾아가보길 바란다.

    어쨋건, 나는 1, 2학년 때도 최대한 정유진을 피해 다녔다. 등교도 무리해서 30분씩 일찍 하고, 하교도 일부러 더 늦게 하는 식이었다. 다행히 우리 학교는 더 공부하겠다고 말하면 12시까지 문을 열어줬기 때문에, 야자가 끝나는 10시부터 30분이나 1시간씩 더 늦게 가는 식이었다. 나는 반장이었기 때문에 공부를 더 하고 가겠다는 핑계도 간단히 먹혔다. 어른들은 반장이라고 하면 쉽게 모범생 같은 것은 상상하니까,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한 셈이다.

    하여튼, 나의 그런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운이 다했는지 3학년에 와서 나는 정유진과 같은 반이 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첫날부터 그 아이가 다가와 내게 말을 걸 줄 알았다. 멍청한 아이니까 굳이 눈치 없이 옛날의 우정 따위를 운운하면서 굳이 상처를 받은 뒤에야 떨어져 나갈 거라 생각한 거다. 그렇지만 의외로 유진은 첫날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교실 한가운데에 혼자 앉아 있었다. 그렇게 말이 없는 아이가 아닐 텐데, 그렇게 생각했지만 나는 머지않아 그 아이가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미 내가 알고 있는 어린 시절의 정유진과 다른 사람이었던 것을 순진하게도 나는 고등학교 3학년에 이르러서야 깨달은 것이다. 덧니, 그 빌어먹을 덧니가 여전히 입에 남아 있는지, 아니면 중학교에서 봤던 그 멍청한 왕따처럼 교정하고 있는지 알 수도 없었다. 그 아이는 입을 열질 않았다.

    3학년 등교 첫 날, 나는 교실에서 이상한 것을 깨달았다. 남학생과 여학생 그룹이 나뉘는 것은 흔하게 있는 일이었지만, 남학생들이 이상하게 조용했다. 그러려니 생각했지만, 담임 선생님이 들어온 뒤로 더욱 이상했다. 담임은 1학년 수학 선생이었는데, 중년에 결혼도 하지 않은 선생이 훈계를 빙자한 성희롱 같은 소리를 한다고 여학생들 사이에서 유독 평판이 안 좋았다. 그 선생도 말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이상하게 무게를 잡았다. 나만 그것을 느낀 것은 아니었는지, 내 옆에 앉은 학생이 선생이 폼을 잡는다고 킥킥거렸다. 그렇지만 교실에서 그보다 깊은 것을 눈치챈 것은 나뿐이었다. 오로지 시체 냄새나는 개미굴에서 아양 떨며 살아온 나였기에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모든 남자들의 시선이 유진의 몸을 향했다. 남학생들과 심지어 교사마저 음탕하게 그 궁상맞은 몸을 훑어대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무심코 토할 것 같았다. 그 장소에 있는 사람은 모두 죄인이었다. 남자들은 강간범이었고, 여자들은 공모자였다. 나는 오랜 세월을 관찰자라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그보다 큰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유진이가 죽었을 때, 날아간 다리가 20m 밖에서 발견됐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 나는 문득, 순진한 얼굴로 개미의 다리를 옷에 문지르던 유진이의 얼굴이 생각났다. 그 아이가 죽었을 때, 몇 명이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까. 좀비라면 죽어도 괜찮으니까.

  • ,

    신예리 – 동물 시체에서 사는 아이(2)

    알다시피 유진과 내가 계획한 끔찍한 범죄는 허사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우리의 공생관계는 끝나지 않았다. 아니, 공생이라기보다는 상호 간의 기생에 가까웠다. 우리는 깨진 거울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와중에 흉한 모습만을 왜곡해서 부각했다. 그 아이와 있을 때, 나는 스스로에게 혐오감마저 느꼈다.

    우리는 아침마다 서로의 부모님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면서 우리가 세웠던 계획이 그들에게 들키지 않았는지 노심초사하며 정찰한 것이다. 그리고는 지난 밤 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에 안도하며 같은 등굣길을 걸어 학교를 향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서로 한 마디의 대화도 주고받지 않았다. 친구가 아니었으니 당연했다.

    다행히도, 우리의 이런 불편한 기생 관계는 초등학교를 졸업하며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 우리 빌라는 K 초등학교와 K 중학교의 중간쯤에 있어, 이 동네에 사는 아이들은 보통 K 초를 졸업하고 K 중으로 진학하게 된다. 그래서 주변에 사는 초등학교 친구들은 모두 K 중으로 들어가게 되었지만, 나는 아버지를 설득해 멀리 떨어진 K 여자 중학교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버지도 내가 공학을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뜻 허락해 줬다. 어머니는 탐탁지 않아 보였지만, 집안에서 어머니의 의견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알았다.

    K 여자 중학교는 K 중학교에 비하면 우리 빌라로부터는 꽤 떨어져 있었다. 동네에 있는 모든 교회를 찍고 돌아가는 마을버스를 타면 30분 정도, 걸어서는 1시간 정도의 거리였다. 나는 작고 흔들리는, 그리고 사람이 많은 버스를 타는 것이 싫어서 걸어서 등교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 덕에 나는 남들보다 1시간은 일찍 집을 나오고, 1시간은 늦게 집에 돌아왔다. 내가 예상한대로 유진은 K 중학교에 진학했고, 그렇게 사실상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접점은 사라졌다. 덕분에 나는 3년간, 유진과 이웃집에 살면서도 그 아이로부터 해방된 시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정든 초등학교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도, 아침 일찍 일어나 한참을 걸어야 하는 것도 그 대가라고 생각하면 별거 아니었다.

    걱정한 중학교 생활은 생각보다 쉽게 풀렸다. 여자 중학교 특유의 단결력 덕분이었다. 아이들은 번갈아 타겟을 정해서 왕따 시켰고, 그 무리에 낄 수만 있으면 금방 친구를 만들 수 있었다. 아버지를 닮은, 기가 쎄보이는 날카로운 눈초리 덕분인지, 아니면 단순히 공부를 잘했기 때문인지 몰라도, 다른 지역에서 온 입학생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타겟으로 잡히는 일이 없었다.

    특히나 오래 괴롭힘을 당한 아이가 있었는데, 자그마치 1학년 1학기 중반부터 3학년 졸업할 때까지 괴롭힘이 이어졌다. 성적은 중상위권은 했고, 커다란 나이키 로고가 새겨진 가방을 메고 다니는 아이였다. 조금 눈에 띄는 점이라면 덧니 때문에 입이 약간 튀어나온 정도였는데 애교로 봐주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아이들에게는 그것도 충분한 명분이 되었는지, 집요하게 그 아이의 외모를 빌미 삼아 괴롭혔다.

    내가 보기에는 괴롭히는 애들 중에서도 그 아이보다 못생긴 아이도 제법 있었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아이들이 정말로 그 아이가 못생겨서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았다. 별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닐 것이다. 어른들이야 괴롭힘의 원인을, 무리에 찬동하며 심리적인 안정감을 얻는 것이나, 자신보다 유능한 사람에 대한 적개심 같은 다양한 이유로 설명하지만, 직접 관찰한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아마 재밌으니까 그랬겠지. 오로지 괴롭힘당하는 아이만 바보같이 그 말을 믿고, 치아 교정을 하거나 화장을 하거나 했지만, 그것도 괴롭힘의 소재로 이어질 뿐이었다.

    이렇듯, 나는 즐겁게 중학교 생활을 보냈다. 평범한 중학생 같은 충실한 나날이었다. 그런 나의 일상을 어떻게든 망치고 싶었는지, 유진은 잊을만하면 한 번씩 편지를 보냈다. 바로 옆집에 살고 있는데 무려 우표까지 붙여서 우체국을 통해서 편지를 보낸 것이다. 아둔한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인데, 그 아이는 그 한도를 모르는 것 같았다. 당연히 나는 대부분 찢어서 버렸지만, 깜빡한 것이 있는지 얼마 전에 방을 정리하다가 한 통의 편지를 발견해 여기 끼워 놓았다. 마음만 같아서는 이것도 버리고 싶었지만, 그 아이가 남긴 유품이라 생각하고 남겨두기로 했다. 더욱이 나보다는 가십거리를 찾아다니는 기자들에게는 필요할 것 같았다.

    그렇지만 다시금 읽어보니 기억보다 터무니없는 내용이었다. 마치 그것을 사실로 여기는 듯이 망상을 늘어놓으니 모르는 사람은 속아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니 내용을 읽기 전에, 혹은 이미 읽은 사람에게 당부하지만, 쓰여있는 내용과 달리 우리 사이에는 어떤 우정도 없었다. 실제로 나는 한 번도 답장을 보낸 적이 없었고, 편지를 보관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 아이의 일방적인 묘사와 달리, 나는 그 아이를 친구로 여기지 않았다. 심지어 그 아이도 나를 그렇게 생각했다. 그 아이는 타고난 거짓말쟁이라, 적혀 있는 내용 중 대부분이 잘 짜맞춰 진 헛소리인 것이다. 나는 중학교 3년 내내 그 육교를 건너지도 않았다.

    예리야, 잘 지내고 있니?

    이렇게 말하려고 하니까 이상하네. 우리는 바로 옆집이니까 원한다면 언제든지 대화하고 얼굴 볼 수 있을 텐데. 그렇지만 너와 내가 만나지 못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아. 1년 정도 되었을까? 너와 같은 중학교에 갔더라면 매일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지금도 후회돼.

    사실 나는 너한테 편지를 보내면 안 돼. 너희 어머니께서 내게 너와 만나지 말라고 당부했거든. 그렇지만 이건 편지니까 엄밀히 말하면 만나는 것에 들어가지는 않지? 그래도 안된다고 생각하면 그냥 이 편지를 읽지 말고 버려주렴. 그냥 버리면 너희 어머니가 주워서 볼 수도 있으니까 갈기갈기 찢거나 태워서 버리는 게 좋을 거라 생각해. 물론 너는 똑똑하니까 내가 이렇게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걱정돼서 말해봤어. 기분 나쁘지 않았으면 좋겠네. (물론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어줘도 돼! 대신 들키지 않으면 좋겠네!)

    학교생활은 잘하고 있니? 부끄럽지만 나는 별로 친구를 만들지 못했어. 아는 애들이 대부분 다른 반이 됐거든. 나 빼고 다른 애들은 다 아는 사이였는지, 처음 반이 잡힌 날부터 서로 떠들고 있었어. 처음 몇 번은 걔네와 같이 밥을 먹거나 얘기하기도 했지만, 나는 역시 혼자 있는 게 더 편한 것 같아서 어울리는 걸 그만뒀어. 그렇지만 오해하지 말아줘. 걔네는 좋은 아이들이고, 나는 딱히 왕따를 당하는 건 아니니까. 그렇지만 역시 너하고 같은 중학교를 다니는 게 좋았을 것 같아. 그러면 반이 달라도 쉬는 시간에는 만날 수 있으니까.

    K 여중 생활은 어떻니? 여중이니까 K 중하고는 분명 다르겠지? 중학교에 올라오니 남자아이들은 더 이상해졌어. 매일 야한 얘기를 하고, 엄청 시끄럽고, 이상한 냄새가 나. 체육 시간만 끝나면 반에서 땀 냄새가 엄청 나는데 정말로 나는 그런 지독한 냄새는 살면서 처음 맡아봤어. 남자애들은 반에서 뛰어다니는데, 그때마다 책상을 강하게 치고 가. 어릴 때는 그래도 내가 더 키가 커서 괜찮았지만, 요즘은 남자애들이 나보다 키가 더 커서 조금 무서워. 역시 나도 여중에 들어가는 게 좋았을 것 같아.

    요즘에는 쉬는 시간에 책을 읽고 있어. 좋은 책이라 너에게도 꼭 추천해주고 싶어.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라는 책인데, 혹시 읽어본 적 있니? 거기에 보면 원래 살던 별에서 떨어져 나와 고향별에 있는 장미 친구를 걱정하고 그리워하는 어린 왕자가 나오는데, 나는 그 모습이 왠지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해. 우리는 그렇게 멀리 떨어져 생이별한 건 아니지만 내가 항상 너를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사실 나는 얼마 전에 너를 본 적이 있어. 우리 집 앞에 있는 육교 알지? 우연히 길을 가는데 육교를 건너가는 네가 보이더라. 반가워서 말을 걸까 하기도 했는데, 네 표정이 유독 어두워서 그냥 지나치고 말았어. 지금 생각하면 아마 말을 걸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봤어야 했던 것 같은데 미안해. 내가 이렇게 장황하게 편지를 쓰고 있는 건 사실 그것 때문이기도 해. 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었거든.

    괜찮으면 언제라도 답장 보내줘. 물론 답장을 보내지 않아도 돼. 그러면 너는 아무 일도 없었고, 내가 공연한 걱정을 했다고 생각하면 되니까.

    너의 소꿉친구, 정유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