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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7월 21일 – 내게는 기이한 버릇이 하나 있다

    내게는 기이한 버릇이 하나 있다.

    어떤 상황이든 내가 죽은 뒤를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자기파괴적 몽상은 내 아드레날린을 솟구치게 하고, 어떤 약물도 선사할 수 없는 쾌락을 선사한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집안에 있던 내가 갑자기 의자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침대 위에 올라가 창문을 열고, 안쪽 창문을 열고, 방충망을 열고, 저 너머로 뛰어내리는 것이다. 높지 않으니 죽으려면 꼭 머리부터 떨어져야 할테지. 나는 다이빙 선수처럼 화려하게 활공할 것이다.

    그렇게 나는 죽는다.

    내 시체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처참한 시체의 몰골에 충격받을 것이다. 아마 이것으로 정신적 외상을 입어 병원에 다니게 될지도 모른다. 혹은 어떤 감수성 예민한 아이의 눈에 들어가서 그를 나와 같은 자기파괴적인 몽상가로 키워낼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의 시체는 그렇게 정신적인 양분이 되지만, 내 시체를 먹고 자라야 할 개미와 파리, 들개에게는 주지 못할 것이다.

    머지 않아 병원과 경찰에서 사람이 나오고, 흩어진 내 파편을 핀셋으로 주어 모을 것이다. 부숴진 도자기 인형을 짜맞추듯이 정성스럽게 봉합할 것이다. 나는 기성품으로 나와 내 몸에 아주 딱 맞지는 않는 싸구려 관 안에 눕혀지고, 받아야 하는 모든 사람이 장례식 초대장을 받은 후에야 장례식장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사람들의 곡소리를 듣다가 화장터로 옮겨지고 한줌 되지 않는 검은 재가 되어 여기저기 흩뿌려질 것이다. 그나마 남은 것은 생전 머리만한 항아리 안에 보관되어 어딘가에 버려길 것이다.

    나를 아는 몇 없는 사람들은 내 죽음에 심심한 애도를 마치고 완전한 망각 너머로 잊고 말 터이다. 드물게도 날 소중히 여긴 사람은 내 죽음에 매일 앓고 마를 터이다. 나와 일면식조차 없이 교류해온 사람들은 내 실종에 의구심을 품다가 이제야 죽었다는 것을 납득하고 흩어질 터이다. 나의 글에는 부고문이 걸릴 테고, 누군가는 내 죽음을 애도하기도 하고, 혹은 우스꽝스럽게 풍자하기도 할 터이다.

    그렇게 나는 죽었다.

    내게는 그런 기이한 버릇이 하나 있다. 고작 1, 2분이면 나는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검은 재가 되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알지 못하게 된다. 生死 生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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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7월 20일 – 응고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으면 뇌수가 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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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7월 19일 – 일신상의 곤란한 사정

    실로 곤란한 일이 생겼다.

    갓 태어난 치와와 한 마리를 맡게 된 것이다. 태어난 지는 3개월 조금 못 되었으며, 검은 털이 배 쪽에 이르러 하얀 털과 만나 파도처럼 물결치는 모습이 꽤 멋스러운 장모견이다. 머리는 아주 좋아 단번에 소변을 가리고, 애교는 얼마나 많은지 처음 보는 사람 손도 잘 핥고 뛰어다니는 씩씩한 암컷 치와와이다.

    하지만 어찌 됐건, 이것은 내게 아주 난처한 일이다.

    집에 개를 들이고 첫날에 나는 악몽을 꾸었다. 다음날도 그러했다. 이것이 강아지와 관련한 일임은 구태여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예컨대 내용은 이런 식이었다.

    어떤 형태로건 나는 이 아이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할 것을 예측한다. 그것은 일종의 예지몽인데, 영원히 사는 생물은 없기에 저 델포이의 신탁보다도 적중률이 좋았다.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저것도 영원히 살지는 못한다. 지금은 내 손만 봐도 좋아서 물어뜯고, 내 다리만 쫓아서 꼬리 흔들며 쫓아온다지만, 10년만 지나도 폭삭 늙어서 기운 없이 눈만 움직여 내 모습을 쫓다 말 것이다.

    그러다 하루 이틀 서서히 약해지며 시름시름 앓다가 어느 이름 모를 병으로 고통스럽게 생을 마감할 것이다. 이것은 개중에서도 가장 희망찬 것이라 내게 기운을 준다.

    혹은 이런 경우도 있다.

    언젠가 내가 말 못하는 짐승을 돌보는 것이 질려, 저것을 수풀에 풀어주는 것이다. 그러면 이 불쌍한 것은 평생 제 어미라 따르던 자에게 버림받은 줄도 모르고, 그것을 이해할 때까지 검댕 묻은 몸으로 차도를 뛰어다니며 해본 적도 없는 사냥 따위를 흉내 낼 것이다. 그리고 평생 방보다 넓은 곳을 뛰어다녀본 적이 없는 탓에 쥐 한 마리 잡지 못하고 헥헥거리며 쓰러질 테지.

    그것이 머잖아 굶어 죽거나, 추위에 동사하거나, 어떤 불운한 운전자에 의해 피치 못할 사고를 당하리란 사실은 분명하다. 야산의 늑대라면 그렇지 않겠지만, 이놈은 종자부터 펫숍에서 120만 원짜리 가격표 태그 탯줄을 목에 달고 유리창 안에서 자연 분만한 개체란 말이다.

    어쩌다 개를 좋아하는 지인에게 파양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놈은 이미 내게 길들여지고 말았다. 나를 부모라 여기고 있기에 일평생 나만 쫄랑쫄랑 쫓아다닐 요량으로 꼬리를 흔들어 재끼던 놈이란 말이다. 그런데 그놈이 제 부모에게 버려지고, 내가 나갔던 낯선 현관을 응시하며 평생토록 나와의 재회를 기다리란 사실은 눈을 감아도 훤히 보였다.

    강아지가 내 손을 핥고 물은 이후부터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었다. 언제나 다 자라지 않은 이빨로 약하게 문 손가락의 감각이 지워지지 않고 남게 되었다. 10년이고, 20년이고 지난다고 지워질 흉터가 아니란 말이다.

    죽음에 미학은 없다. 모든 것은 추하거나 비극적으로 죽는다. 내가 몸만 들썩여도 잠에서 깨어 어둠 속에서 날 올려다보는 저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는 그대로 얼어붙어 매번 저것의 주마등을 대신 본다.

    그런 연유로 나는 아주 곤란하게 되었다. 정말로 곤란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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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7월 18일 – 타니

    타니가 오다.

    내 인생은 파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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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7월 15일 – 소박한 상실, 소박한 망각

    자주 가던 카페가 문을 닫았다.
    워낙 두문불출했던 탓에 오늘에야 알게 되었다.

    공사가 진행된 것을 보아, 어제오늘 일 같지는 않았다.
    별로 인상에 남지 않은 수수한 간판이었던지라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정갈하긴 하던 간판이 있던 자리에 대신,

    한우국밥 7,000원
    산더미불고기 9,000원
    점심특선 쌈밥정식 8,000원

    원색으로 형형색색한 간판이 들어서 있었다.


    땡볕 아래서 사다리를 타고 위험한 작업하는 인부님들께는 죄송했지만, 그것이 어찌나 가증스럽게 보이던지.
    키우던 물고기 주검 위에 올라탄 파리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면, 어릴 적 키우던 물고기 색깔이나 종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일주일쯤 지나면 그곳에 카페가 있었다는 것도 까먹고 말겠지.

    소박한 상실, 소박한 망각.
    세상 일이란 게 그런 법이지.

    아참, 그러고 보니 오늘은 흰 구름 사이서 먹구름을 봤다.
    자글거리는 모양새라서, 먹구름이란 꽤나 눈에 띄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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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7월 14일 – 하루 늦은 일기

    집에서 하루 늦은 일기를 발견했다.
    이것은 도통 어디 쓰려 해도 쓸모가 없다. 앞으로 있을 일은 물론이고, 계획을 잡는 데도 도움을 주지 않는다.

    그나마 쓸만한 곳이라곤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리는 정도인데, 고작 하루 전 일은 지금 나도 충분히 기억한다.
    그러니 정말로 쓸데가 없는 것이다. 기왕이면 하루 이른 일기였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덕분에 나는 오늘 일기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어제 일기를 찾지 못했다면, 오늘은 어제 일기를 적어야 했고, 내일도 어제 일기를 적어야 했겠지.

    그런 면에서 아주 쓸모없는 과거란 없는 법이다.
    그렇다고 한들 역시 어딘가 쓰려고 하니 마땅한 부분이 없어서 책장에 끼워놓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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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7월 12일 – 일기의무제

    일기란 어렵다.
    日부터가 어렵다. 매일 무언가 반복해야 하는 제약이 생긴 것이다.
    이러려고 시작한 것이 아닌데.

    주도와 강제의 균형을 잡는 게 썩 쉽지 않다.
    주도적으로 일기를 쓰려고 시작하면, 꼭 그게 강제 같아서 지치는 것이다.
    첫날 일기는 주도적으로 쓰되, 다음 날부터 조금씩 강제적이 되는 셈이다.

    만약 군인들이 총칼을 들이밀고 일기를 쓰라고 한다면?
    그러면 이전보다 더 자주 쓰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 본성이란 것이 변하지 않아서 누군가는 일기를 쓰지 않겠지.
    그리고 암시장으로 발을 옮기면 일기 상인들이 있을 것이다.

    “7월 12일 자 일기 있어요?”
    “우리는 내일 일기만 팔아서… 7월 13일 일기는 관심 없어?”

    이런 식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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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7월 11일 – 암탉

    최근 암탉 울음소리를 듣는 일이 부쩍 늘어났다.
    주로 새벽 3시 40분쯤에 들린다.

    닭은 주로 해가 뜰 때 운다고 알고 있는데, 실은 해가 뜨지 않아도 우는 것이다.
    그러니 무엇을 기준 삼아 울게 되는 건지 알기 어려워졌다.

    제깟 것이 시계를 보는 법을 알지도 못할 텐데.
    자다가 깨면 기지개 켜듯이 우는 게 아닐까 생각해도, 그렇다면 암탉은 하루도 늦잠 자지 않는 것이 된다.

    내 추측은 이렇다.
    어디선가 암탉 우는 소리가 들리면 그 소리를 듣고 눈치껏 우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 세계 어딘가에 첫 울음의 시발점이 있었겠지.
    암탉 전파탑이 되어서 주변에 파장처럼 퍼져 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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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 – 나는 결국 죽은 것밖에 사랑할 수 없다.

    나는 망망대해를 건너고 있다

    일생 나는 불편을 느끼면서도 도통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모르다가, 어젯밤 침대에 누워 별과 창문의 노래를 듣다가 간신히 알게 되었다. 내게는 생명의 자격이 없다. 나는 생식을 혐오한다. 다른 생명을 먹어 양분 삼는 것은 물론이며, 다시 깨어날 수 있을지 불안한 내 의식과 이성을 맡기고 잠들고 싶지도 않으며, 성애는 혐오의 절정이다.

    그리고 나와 같이 자격 없는 자는 결코 창작해서는 안되었다. 진정 삶을 노래할 수도 없을 뿐더러, 설령 그러하거든 모두 거짓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창작이란 도대체 무엇이냐, 나는 오히려 영원한 허무가 좋단 말이다.

    나는 지옥의 한복판에 있다. 이곳은 생명으로 가득하여 나는 필히 살생할 수밖에 없고, 또 그것이 사그라드는 것을 관망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지옥의 특성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특성을 가진 곳이 지옥뿐이 또 있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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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아지 배신감

    강아지는 언젠가 사람만큼 클 거라고 믿겠지만, 그러지 못하고 죽어갈 때 무슨 생각을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