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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에서 머리가 자란 날 外

    나무에서 머리가 자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떡잎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영락없이 머리다. 태아처럼 투명하고 만지면 푸욱 꺼지는 부드러운 머리였는데, 점점 커지더니 머리카락이 자라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은 검은색이었는데, 머리카락이 까슬 거리는 직모라 쓰다듬으면 찔리고 말았다. 찔린 자리에서 피가 나길래 만지는 것은 그만뒀다.

    눈꺼풀은 있었는데 언제나 감고 있어서 눈알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열어젖힌다면 확인은 할 수 있겠지만, 내 모습을 보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나는 언제든 나무가 나를 엿볼 수 있겠다 싶어서 불을 끄고 커튼을 쳤다. 귀도 있었는데 나는 그것이 꼭 필요한지는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무도 노래를 들으면 잘 자란다는데, 그렇다면 귀를 달 것도 없이 소리를 들을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나는 원예가가 아니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입이었다. 머리는 가끔씩 우물거리기도 하고, 혀를 내밀기도 하고, 목소리도 왕왕 냈다.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걸까 싶어서 귀를 들이밀었더니 그대로 귀를 물렸다. 귓바퀴에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머리는 계속해서 커지더니 어느새, 내 머리보다 조금 더 큰 것이 되었다. 어디까지 자라나 계속 보고 있었더니 갑자기 말하기 시작했다.

    “고마워요.”

    나는 기분 나빠져서 나무를 베어버렸다.

    아기는 섭씨 15도에서 25도 안팎의 온도에서 태어난다. 습도는 60%가 적당하며, 시간은 해가 진 뒤가 적당하다. 여름에는 주로 22시에서 2시 사이이며, 겨울에는 18시에서 24시 사이이다. 갓 태어난 아기는 피부가 건조하니 따뜻한 물로 적신 수건으로 덮어주는 것이 좋다. 아기는 종종 물에서 태어나는데, 이 경우 재빠르게 건져줘야 한다. 아기는 태어나면서부터 헤엄을 칠 줄 알기 때문에 개인차가 있으나 10분에서 20분 사이는 물에 방치 해도 문제없다. 주변에 뜨거운 물건이 있는지 신경 쓰는 것이 좋다. 갓 태어난 아기가 다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거울 속에 검은 상복을 입은 내 모습.

    너무 아름다워 몇 시간이나 쳐다보고 말았다.

    관에 누워있는 누군가는 한없이 나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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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나

    어제 누나가 죽었다. 자살이었다.

    알게 된 것은 오늘 새벽이었지만, 정확히 언제쯤 죽었는지 알지 못했다. 경찰관도, 부검의도 알려주지 않았다. 

    가족이 죽었다. 자살이었다.

    알게 된 것은 어제였지만, 정확히 언제쯤 죽었는지 알지 못했다. 말하지 않은 건 실수인 듯했지만 물어보면 괜히 상대를 지적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하지 않았다. 그건 내 잘못이었다. 상주로서 수 차례 물어보는 질문 중 가장 곤란한 것이 언제 가족분이 별세했는지였다. 그때마다 나는 아홉 시에 죽었다, 열두시에 죽었다 등등 되는 대로 대답해서, 가족은 온종일 자살하는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지금은 관 속에 있을 가족의 모습을 영정으로 엿볼 때마다 질투가 치솟았다. 아마 먼저 죽는 건 내가 될 줄 알았는데, 선수를 빼앗긴 것이다. 그 때문에 죽은 사람은 편하게 누워 있는 동안, 나는 혼자서 복잡한 장례 절차나 행정 업무를 다 도맡아야 했다. 소리를 질러도 평소처럼 고함으로 돌아오거나 하지 않아서 나만 멀뚱히 바보처럼 보이게 되었다.

    별로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이상하게도 부고를 들었을 때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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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나 外

    누나가 거북을 데려왔다.
    죽지 않으니 내게 알맞다고 한다.
    누나는 거북보다 일찍 죽었다.



    진동하는 별의 소리에 놀라 깨었다.
    울음, 웃는 건 확실히 아니고.
    다시 들으니 역시 우는 게 맞았다.



    어깨가 들썩거린다.
    심장이 뛸 때마다 그랬다.
    고동과 고통은 닮았다.

    개미는 시체를 먹고 산다.
    누가 죽어야 개미가 사는 것이다.
    우리 할머니도 반쯤은 개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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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과 시간

    본작은 연대기적 구성을 따르고 있다.
    시간순으로 사건이 발생하고, 그 결과와 여파를 착실히 묘사하는 형태로 작중 전개를 이끌어 간다.

    그에 반해 시계열은 주요하게 다뤄지지 않고 있다.
    이는 시간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구체적인 시기를 묘사하는데 들이는 품이 적다는 의미이다.

    이유는 여럿 있으나, 미관상의 이유가 가장 크다.
    일일이 날짜를 나열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설명문에 아라비아 숫자가 자주 나오게 되는데,
    이것이 한글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아서 보기 싫다는 개인적인 감상이다.
    우리말로 이뤄진 수사를 사용할 수도 있지만, 수사는 가독성을 해치며 통일감도 떨어트려서 기피한다.

    그러기에 나는 사건 발생일을 추측할 만한 간접적인 요소를 여럿 배치하고 있다.
    그 요소는 아주 다양하지만, 그나마 자주 인용되는 것은 크게 셋으로 나눠진다.

    첫째는 저번 사건과 이번 사건의 간격이다.
    모든 사건이 시작하기 앞서 저번 사건으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월이나 주 단위로 묘사를 빠트리지 않고 있다.
    그 때문에 매번 일자를 언급하는 일 없이도 어떻게 시간이 흐르고 있는지 파악하기 용이하다.

    둘째는 필레몬 허버트(작중 화자)의 출근일이다.
    교수직을 겸일하고 있는 필레몬은 작중 한 번밖에 묘사되지 않았지만, 늘 같은 요일에 수업을 나간다.
    바로 화요일과 금요일이다. 파악할 수 있는 시간과 비교해보면, 그가 성실하게 교수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드물게 예외는 있는데, 그때마다 바빠서 수업이 없는데도 출근했다는 사담이 붙곤 한다.

    셋째는 달의 형태이다.
    달의 형태로 시간을 표현하는 건 보다 작품 외적인 이유가 크다.
    본작에서는 밤은 주요한 무대로, 저 하늘의 져버린 해, 별, 그리고 어둠마저 저마다 상징적인 역할을 가진다.
    어느 하나도 작품 주제와 닿은 불온한 요소라, 쉽게 묘사하기가 어렵다.

    반면, 달은 반복하는 평온한 이미지를 지키고 있다.
    그 덕에 일상적인 시간을 묘사하는 역할을 부여하기가 쉽다.
    다만, 매번 묘사할 때마다 해당 일의 달 모양을 계산하는 건 귀찮은 일이기 때문에, 아래 사이트에 도움을 받고 있다.

    www.moongiant.com/moonphases/december/1896/Full & New Moon Schedule For December 1896See the Full Moon, New Moon and Quarter Moon Phase will occur durning December.www.moongiant.com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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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덩어리

    어릴 적부터, 나는 멈춰 있는 세상을 본 적이 없었다. 벽은 쉼 없이 꿈틀거렸고, 천장에는 길게 이어진 검은 덩어리가 내려왔다 올라갔다를 반복했다. 온 세상은 검은 것으로 도배되어 있었고, 운이 좋아야만 간신히 그 사이로 사물의 원형을 볼 수 있었다.

    “색맹인 것 같습니다.”

    의사가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나는 색깔을 볼 수 없는 게 아니었다. 그저 세상이 검은색으로 뒤덮여 있을 뿐이었다. 아이에 불과했던 내 빈약한 표현력으로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었고, 나는 전색맹 판정을 받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부모님은 의사의 말을 믿었다. 색맹을 위한 그림책을 사주거나 했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내가 그것을 전혀 보지 못하자, 내가 겪고 있는 증상이 색맹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을 펴면 처음 몇 초 동안에는 그것을 볼 수 있었지만, 곧 검은 것들이 우글거리며 그 위를 뒤덮었다.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물의 윤곽선뿐이었다.

    나는 여러 병원을 다녔다. 눈은 물론 뇌 검사도 받았다. 그렇지만 어느 큰 병원도 마땅한 답을 내지 못하자, 우리는 서서히 그것을 받아들이게 됐다. 내가 남들보다 조금 불행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우리 가족은 내 삶을 이해하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부모님은 내가 책이나 텔레비전을 볼 시간에 운동을 하고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해줬다.

    시간은 흘렀고,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남들과 조금 다른 점 때문에 나는 좀처럼 남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친구들은 모두 비슷한 키였기 때문에 심지어 나는 그들을 구분하지도 못했다. 아이들은 내가 보고 있는 검고 우글거리는 덩어리에 대해 이해하지도 못했고, 나는 그것을 설명하는 것을 관뒀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돌아오니 부모님이 먼저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가방만 방에 두고 곧바로 차에 타 어디론가 실려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자, 어머니는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고 말했다. 시골에 사시는 외할머니가 위독하다는 것이다. 나는 창문이 닫힌 채로는 검은 것 때문에 밖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창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봤다. 옆을 지나가는 차 위에 얹어져 있던 검은 것들이 뒤로 날아가고 있었다. 마치 자동차 뒤로 검은 끈이 생긴 것 같았다. 도로와, 저 멀리 보이는 산은 쉴 새 없이 꿈틀거렸다. 나는 2시간 동안 그 꿈틀거림을 멍하니 바라봤다.

    병원에 도착한 우리는 중환자실로 이동했다. 복도를 걷던 나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누군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나는 불안해져 주변을 둘러봤지만, 그 소리를 들은 것은 나뿐인지 주변의 누구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무서워져 어머니의 손을 꼭 쥐었다. 어머니는 오해했는지 “할머니는 괜찮을 거야.” 하고 나를 위로해줬다.

    할머니라고 하는 검은 덩어리는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그녀의 주변에는 무언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지만, 나는 그것들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의료 기구일 것이라 추측했다. 의사가 부모님을 향해 마음의 준비를 할 것을 권했다.

    그 순간, 나는 이상한 것을 보았다. 할머니가 누워 있던 자리에, 한 늙은 여인이 나타난 것이었다. 내가 태어나서 본 것 중에 유일하게 검은 것에 뒤덮이지 않은 그녀는, 내가 오직 책에서만 볼 수 있었던 온전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우리를 바라보더니 비명을 질렀다. 검은 것들이 그녀의 다리를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여인이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는 동안에도 그것들은 착실히 그녀의 몸을 뒤덮었다. 그리고 입으로, 귀로, 코로, 모든 구멍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더니 내게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여인은 점점 작아지기 시작하더니, 머지않아 그녀가 서 있던 자리에는 정적만이 남았다.

    “임종하셨습니다.”

    의사가 말했다.

    “좋은 곳에 가셨을 거야.”

    아버지가 말했다.

    “아빠가, 사람이 죽으면 사후 세계로 간대.”

    그 아이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사후 세계에는 뭐가 있을까?”

    “개미.”

    내 눈에 담긴 두려움을 본 걸까. 그 아이는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난 죽지 않을래.”

    나는 슬픈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누구도 그럴 수 없어.”

    옛날에 썼던 것.

    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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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돋아나는 이빨, 변화

    세 번째 이빨은 우화의 증거다.

    인간이되 인간이 아니게 된 증거이다.

    이빨이 여러 번 자랄 수록 인간에서 멀어진 것으로 분류되며, 그 끝에는 이빨로 뒤덮인 얼굴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세 번째 이빨이 자랄 때부터 우화의 꿈을 꾸게 된다.

    쟝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만남을 기억했다. 그건 6살 무렵, 딱딱한 빵을 씹던 때였다. 빵을 물어 뜯다가 평소와 달리 혀 근처가 허전하고 입에 찬 바람이 든다는 걸 깨달은 쟝은 즉시 자신의 몸에 일어난 변화를 체감했다. 그 광경은 지금도 잊을 수 없었다.

    창밖의 바람이 불때마다 털지 않은 커튼에 쌓인 먼지가 방 안을 떠다니고, 정오 무렵의 햇살에 방바닥의 곰팡이가 선명하게 보이고, 물때와 케첩이 묻은 테이블과 낡은 의자, 거기 앉은 자신의 손에 들린 빵, 그리고 거기 박혀 있는 자신의 앞니. 이가 이르게 빠진 잇몸에서는 피가 흘렀지만 쟝은 그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넋이 나간 채로 이빨을 몇 번이고 햇빛에 비춰보았다. 그날부로 쟝은 당시 가장 아끼던 유리 구슬이 든 병을 비우고, 그 안에 자신의 앞니를 소중하게 담아 놓았다.

    그리고 같은 날 밤, 쟝은 부모님 몰래 실과 망치를 방에 가지고 들어가, 자신의 남은 이빨을 모두 뽑아버렸다. 통증과 출혈로 어지러웠지만, 그의 병 안에는 피 묻은 19개의 유치가 전리품으로 들어 있었다. 너무 빨리 이빨을 뽑은 탓에 음식을 씹을 수 없었고, 쟝은 거의 굶어 죽을 뻔했지만 빠르게 자란 앞니로 빵을 씹어서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때 이후로 살이 붙질 않아서 살집이 있는 편이었던 쟝은 길가의 거지조차 손을 내밀지 않을 만큼 말라붙었다. 그것이 그가 기억하는 첫 번째 변화였다.

    하지만 병을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이빨은 지금보다 수십 배는 더 필요했다.

    세계관을 잡기 위해 쓰다가 만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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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완성 단편 (심리 상담)

    “요즘은 어디에나 기계가 있잖아요?”
    “그렇죠. 아주 편한 세상이 됐죠.”
    “아니, 제가 하고픈 말은, 그런 게 아니라….”

    여자는 손을 모으고 두 엄지를 마주 비볐다. 그녀 자신은 자각하지 못했지만, 신중히 말을 고를 때 언제나 그랬다.

    “정말 어디든 있잖아요? 편의점이나, 식당이나, 심지어 회사에도….”

    입과 목청을 함께 닫고, 그녀는 고개를 살짝 내리깔았다. 그리고 동공만 살짝 위로 올리며 눈치를 살폈다. 이것도 그녀의 낡은 습관 중 하나였다. 지나간 시대의 미덕들은 여전히 흔적기관처럼 그녀의 행동 곳곳에 남아 있었다.

    남자는 눈살을 구겼다.

    “기계가 있는 게 싫다고요?”
    “아니, 아니요! 제 말은 그게 아니라!”

    그녀는 황급히 부정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뭐든지 좋아요.”

    남자는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치 볼 필요 없어요. 생각나는 대로 마음에 있는 말을 전부 꺼내보세요. 여기서는 아무도 이상하게 안 봐요.”

    그는 턱을 괴며 살짝 앞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제 말은….”

    여자는 한참 숨을 삼키고는 힘겹게 한 마디 한 마디를 토해냈다.

    “심리 상담까지 기계가 하는 건 좀 어떨까 하고….”

    그렇게 그녀는 눈앞의 상담형 모델의 눈치를 살피며, 꼭 파리 새끼처럼 손가락을 비벼댔다.

    날 것의 아이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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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완성 단편 (풀무)

    평생 철을 만져온 영식은 다른 일을 몰랐다. 언제는 철판을 밀기도 했고, 언제는 철봉을 깎기도 했지만 그 본질은 언제나 철이었다. 그저 우직함만이 미덕인 줄 알고 35년간 철을 밀고 닦았다. 어느새 고통보다 익숙한 것이 된 철판의 열기와 무게가 그의 세월을 증명해 주었다. 한 때 뜨겁게 타올랐던 정열은 그저 안으로 삭아 영식의 내면에서 끓었다. 자신은 아직 식지 않았다고 영식은 생각했다. 가슴 어딘가에 있는 풀무가 뜨겁게 달아올라 있다고, 그리 생각할 때마다 영식은 타오르는 감각을 느꼈다. 그는 자신을 두드리는 고행자였고, 그때마다 단단하고 순수한 것이 되었다. 철을 다루는 그의 모습에는 경건함마저 묻어났다. 영식은 용광로였다. 불순물을 녹여내 오롯이 순수한 것만이 표면에 떠올랐다. 그런 만큼 그의 얼굴은 단단해 졌는지 모른다. 영식에게 안면마비가 찾아온 것은 작년 겨울이었다.

    영식은 표정이 없는 사람이었다. 참는 것만이 좋은 것이라 배워온 어른이라 그런지 언제나 눈살을 모으고 살짝 눈썹을 치켜올리는 것으로 모든 감정을 표현하곤 했다. 주둥이가 못난 저어새 같았다. 술이 들어가도 얼굴만 붉어지고 말았다. 술을 담는 부대가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계속 붉게 붉게 물들 뿐이었다. 기뻐도 마셨고 슬퍼도 마셨다. 그런 우직함이 시시한 것이었는지 그는 언제나 혼자 마셨다. 그래도 영식은 괘념치 않았다. 뜨겁게 달군 쇠는 물로 식혀야 하는 것을 알았기에 그는 자신의 풀무에 찬 술을 보냈다.

    신세지고 있는 사장님으로부터 혼사가 들어온 것은 마흔을 넘길 무렵이었다. 전등이 어두운 공장 구석에 처박혀 모든 젊음과 열정을 불태운 그였기에 여자를 아는 일도 없었고 그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며 늙은 사장은 난생처음 보는 이름의 여성을 소개해 주었다. 응우옌, 처음 발음하는 그 울림은 이상할 정도로 낯익어 수차례나 입에서 다시 튕겨보게 되는 것이었다. 아는 사람에게 소개받은 만큼 믿을 수 있었고 달리 피할 이유가 없었기에 영식은 그날부터 아는 것이라고는 이름밖에 없는 그 여인과 동거하게 되었다. 혼인 신고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와서는 그것이 진짜 이름인지 알 수도 없었다.

    영식은 철을 때렸다. 때리는 만큼 손도 철도 단단해졌다. 세상은 그렇듯이 정직한 것이다. 고통 없는 성장은 없고 성숙한 만큼 다치는 법이다. 응우옌, 한국어라고는 남들의 반의반만큼도 하지 못하는 그 어린 30대 여성이 영식의 가슴 한 켠을 차지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잘하지도 못하는 한국말 중에 그것을 제일 잘한다는 듯이 항상 “영식, 영식.” 하며 졸졸 따라다니는 그녀는 그와 달리 참 웃기도 잘 웃었고 울기도 잘 울었다. 그녀가 울 때마다 영식도 아팠다. 그것은 불완전함이었고, 연약함이었으며, 온기가 있는 부드러운 살갗이었다. 살을 맞댈 때마다 영식은 속 안에 차오르는 죄악감에 술을 마셨다. 어느새 가득 쌓인 불순물을 가라앉히고 차갑고 단단한 것만을 남기고자 그렇게 잠든 여인을 내버려두고 혼자 술을 마셨다. 누군가 말했던가, 예수의 옆구리에서 쏟아져 나온 피에서는 진한 알코올 향이 흘렀노라고. 종이컵에 담긴 것은 성혈이었다. 두 모금 남짓한 차갑고 쓴 성혈이 풀무를 붉게 태웠다. 밤을 완전히 몰아낼 때까지 그렇게 불태운 것이다.

    가장 순수한 것만 골라낸 철도 언젠가는 녹스는 법이다. 저 외국의 고명한 학자, 켈빈이라는 자가 그리 말했다 하지 않나, 불변이란 없는 법임을, 모든 열은 사그라지는 법이 없다는 것을. 영식은 언젠가 그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고등학교의 문턱조차 밟아본 적 없는 그였지만 이미 가장 심오한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찬 술이 쏟아질 때마다 도리어 속에서는 무언가 뜨거운 것이 치솟고 있음을, 어떤 비극도 인간의 사랑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언제나 알고 있었다! 그는 고행자인 동시에 수사였다. 여성도 모르는 그는 언제나 사랑의 장인이었던 것이다.

    영식은 응우옌과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의 미숙한 한국어 실력 때문도, 그에 못지않게 무뚝뚝한 영식의 성격 때문도 아니었다. 영식은 자신의 가장 연약한 살로 그녀를 품었다. 언어 이상의 고상한 표현 방식이 그들에게는 있었다. 밤이면 천장에 무수한 나비가 흩어졌다가 하나로 뭉쳤다 반복하며 춤을 추었고, 저 천장의, 저 하늘의, 저 우주가 보여주는 황홀경 속에 항상 홀로 술을 부었다. 어둠 속에서 솟아오른 나비들은 그 빛나는 풀무 속에 제 몸을 던져 불살랐다. 마치 죽기 위해 태어난 것 같았다. 영식은 항상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레 기억을 잃었다. 그는 술에 지는 법이 없었고, 불길은 그저 거세질 뿐이었다.

    그냥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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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이 비처럼 내린 날

    어떤 날은 별이 하루종일 쏟아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보통은 3~4시간 정도 쏟아지다 말았다. 처음에는 종말을 외치기도 하던 사람들은 빠르게도 담담해졌다. SNS와 동영상 사이트의 최상위권을 차지하던 별의 향연은 하늘을 올려다보면 언제든 볼 수 있는 흔한 것임을 알게 된 이후로 누구도 관심 주지 않았다. 그저 하늘보다 모니터를 보는 것이 편한 몇몇의 사람에게만 지속적인 수요가 있었다.

    누구도 그것들이 어디서 오는지 몰랐다. 바다 건너의 대단한 나라의 대단한 과학 기관에서는 정보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던가 하는 음모론 같은 것이 떠돌았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별들은 찰나에 내려왔다, 불타서 사라졌으니까.

    사람들은 그렇게 하늘에 관심을 잃었다. 우주는 가장 아름다운 속살을 너무 쉬이 보여줬기에 더이상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 속에 숨어 다가오던 분명한 실체를 누구도 깨닫지 못했다.

    별이 떨어진 것은 태평양 어느 바다라고 했다. 지금껏 없었던 거대한 쓰나미가 일본과 호주, 미국 서부를 강타했다. 하늘은 어두운 재와 불길로 가득했고, 오로지 저 너머에 흐릿한 별의 흐름만이 보였다. 바다는 끓기 시작했고, 그 여파는 지구 반대편에도 닿았다.

    사람들은 지구에 가망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결과, 과학 기관은 이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방법으로 대담한 탈출을 감행했다. 그들은 이것을 통과하면 지구가 안전하던 과거로 갈 수 있다고 설명하며, 반드시 과거의 지구에 이 재앙을 경고할 것을 당부했다.

    더이상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은 그것을 향해 몸을 던졌다. 지금은 볼 수 없게 된 푸른 지구를 본 사람들은 환호하며,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 높지 않은가.

    어떤 날은 별이 하루종일 쏟아지기도 했다.

    5분 만에 써낸 날 것.

    역시 이런 게 좋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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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적 작업 : 줄넘김

    웹소설로 쓰인 글을 서적화하며 줄넘김하는 작업이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1~2 문장, 기껏해야 3 문장 내외로 문단을 설정하는 만큼,

    각 문단의 주제는 2~3 문장 단위로 단절되는 것이다.

    다른 주제를 가진 문단을 합치는 게 자연스럽게 보일 리가 없다.

    결국에는 문장을 다시 쓰게 되는데,

    이렇게 한다고 해도 서사 자체가 짧은 호흡에 맞춰진 만큼,

    각 문단의 이음부가 제 것이 아닌 것처럼 어색하다.

    작업량도 작업량이지만, 기한 제한이 붙는 일이니 만큼,

    아무래도 피곤하다. 출판 계약을 섣불리 결정했다는 생각이 든다.

    +

    하다보니 작업은 되게 재밌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