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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3월 20일 – 금각사

    커다란 금각의 내부에 이토록 똑같은 모양의 작은 금각이 들어 있 는 모습은, 대우주 속에 소우주가 존재하는 듯한 무한한 대응을 연상시켰다. 비로소 나는 상상할 수 있었다. 모형보다도 훨씬 작으면서도 완전한 금각과, 실제의 금각보다도 무한히 커다란, 마치 세계를 감쌀 듯한 금각을.

    – 금각사, 미시마 유키오 (허호 역) 中 –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최소와 최대가 이어지리라는 문학, 종교적인 상상은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존재해 왔다고.

    시간 또한 다르지 않다.

    지금이 지나면, 언젠가 다음 ‘지금’이 찾아올 것이라는 기대도 인간에 내재된 감성이다.

    물리의 편린도 알지 못하는 나는 그러지 않음을 안다.

    이것이 세계의 본질이며, 그저 그뿐임을.

    한없이 거대한 우주 바깥에 존재하는 무존재를 인정하고, 시간의 전후에 있던 무시간無時間을 인정하라.

    우리가 겪는 이 모든 것은 세상이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찰나에 불과하다.

    실존하는 것은 영원한 허무뿐이다.

    그것이 세상의 본질이다.

    나는 그 사실을 먼저 깨달은 벌로서, 아무 가치 없는 죽음 저편, 그리고 생 저편을 상상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생명을 거슬러 올라가는 건 터무니 없고, 죽은 뒤에는 상상할 수도 없을 테니 지금에라도 해두어야겠지.

    그 사실이 슬프다.

    한편, 오늘따라 왼쪽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 숨도 쉬기가 버겁다. 몸이 아프다.

    비가 오는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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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3월 9일 – 이사

    이사를 하니까 돈이 남아!

    이제 3, 4달 정도는 수입이 없어도 살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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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3월 6일 – 시간의 냄새

    계절 사이에는 꼭 어떤 냄새가 난다.

    어딘가에서 나는 것은 아니고, 대기 중에 고르게 퍼져 어디서라도 맡을 수 있는 그런 냄새 말이다.

    특이하게도 계절마다 다른 냄새가 나서, 꼭 그런 냄새를 맡아야만 계절이 넘어간다는 실감이 들곤 한다.

    봄과 겨울은 특히나 좋다.

    봄에는 꽃향기, 풀 내음, 그리고 흙먼지 섞인 냄새에, 늘 왠지 모르게 고등학교 1학년 시절이 생각난다.

    그저 학교 앞에 피었던 벚꽃이 예쁘다고 생각했던 시시한 이유다.

    그 이후로 언젠가 벚꽃을 보러 가겠노라 생각했지만, 매번 봄마다 안 좋은 일이 터져서 이루지 못한 꿈이다.

    지금에서는 가지 못할 이유는 없지만, 이제는 그만한 열정이 없다. 이미 나는 자연에 감동할 수 없다.

    겨울은 정반대이다.

    공기 중에 잡내가 사라지고, 오직 청아한 산소 냄새만 남는다.

    도시에서 떠나질 않았기에 거기에 매연까지 따라와야 그제야 겨울 냄새구나 한다.

    어느 때나 계절이 넘어가면 감상적인 기분이 되곤 한다.

    꼭 열이 나서 드러누우며, 시간이 벌써 이렇게 지났구나, 하면서 하염없게 생각한다.

    세상은 불쌍하다.

    그리고 나도 불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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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2월 25일 – 놀라운 통찰

    작가가 졸리면, 인물들은 신경질적인 어조로 떼를 쓰기 시작한다.
    정말 놀라운 경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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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2월7일 – 죽음에 관하여

    오늘 갑자기 옛일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1학년 혹은 2학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어딘지 모를 여행지에서 잠자리 한 마리를 잡게 된 나는 그 또래 아이가 으레 그러듯이, 그 날개를 잡고 온종일 잠자리가 내 친구라고 상상하며 들고 다녔다.

    그 모습이 어른들에게 얼마나 꺼림칙하게 보였을지, 여행지에서 돌아온 밤, 이제는 슬슬 그걸 놓아주라는 부모님의 권유에, 나는 집 앞 화단에 그것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실내에 들어오고 불현듯, 그 아이를 풀잎 위에 올려줬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무 말도 없이 집 밖으로 나왔다.

    어쩌면 그때 부모님에게 나가도 되느냐고 물어봤다면, 안 된다는 대답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부모님은 하루 내 아이 손아귀에 잡혀 있던 잠자리의 날개가 어땠을지, 그 운명이 어찌 될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내 인생은 더욱 순탄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결국 나왔고, 거기서 보게 된 것은 바닥에 떨어진 잠자리를 물어뜯는 무수한 개미의 모습이었다. 그것은 내가 처음으로 마주한 죽음의 민낯이었고, 집에 돌아간 나는 잠들 때까지 울고 말았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니, 그것이 내가 개미를 그토록 무서워하며, 또 모든 죽음의 이미지에 개미를 연관 짓는 습관의 기원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정신분석학이나 심리학에 능통했다면 더 인상적인 해석을 내놓았을지 몰라도, 그 정도 추측이 내 한계이다.

    하지만 나라도 적어도 한 가지는 안다.

    나는 그날 저주받았다. 잠자리는 제 목숨으로 나로 하여금 일생에 걸쳐 죽음에 관해 고찰할 수밖에 없는 저주를 걸어놓은 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오후 3시쯤,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4시까지 울었다. 어머니는 내가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줄 알고 위로하려 했지만, 내가 당신께서 죽는 모습을 상상하며 울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모든 생물은 죽는다. 그 이후로도 나는 종종 그 일로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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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2월 5일 – 분실

    단 하루 나갔다 왔을 뿐인데, 이어폰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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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2월 4일 – 포르노의 시대

    관능은 오래도록 인류에 기생해왔다. 이른바 삼대 욕구라고 하는 것 중에 성욕을 대리 충족하는 형태로 말이다.
    당사자가 스스로 충족하는 것도 아닐진대, 사람은 본능에 따라 관음을 즐겨왔다.
    인류에게서 동물적인 본성을 거세할 수라도 없는 한, 이런 욕구가 사라질 리는 없다.

    한편 21세기에 와서 대두된 또 하나의 포르노가 있다.
    먹방 말이다. 사람이 많이, 혹은 맛있게 먹는 것을 지켜볼 뿐인 형태의 영상물이다.
    형태는 사뭇 다르나 해체해 보면, 그것이 관능과 별반 다를 것 없는 포르노의 일종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성욕이 아닌 식욕이라는 본능을 자극, 대리만족할 뿐이지만 말이다.

    이런 순서대로라면 마지막에 나타날 것은 분명하다.
    잠방이다.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고 있을 뿐인 영상을 찾아다니며 갈구할 것이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인간의 동물성을 혐오하는 나는 장시간 그에 대해 고찰해 왔다.
    이것은 나의 가설이다.

    생물이 가장 취약해지는 순간은 여지없이 번식의 순간이다.
    수많은 동물이 최대한 짝짓기 시간을 단축해 온 것만 보아도 자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식사의 순간이다. 수면 시간은 빼놓으면 아쉽다.

    이렇듯이 우리가 3대 욕구라고 부르며, 관음하려 하는 것은 모두 자연 상태의 동물에서 가장 취약한 순간이다.
    거기서 나는 이런 추측을 내렸다.

    즉, 사람은 여전히 동물적인 본능이 남아서, 다른 개체가 취약해지는 순간을 보며 정서적 안정감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내게는 꽤 그럴싸하게 느껴지는 추측이었다.
    고로, 21세기는 포르노 아닌 포르노가 범람하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원리로 논리를 확장해, 나는 사람이 같은 공간에서 먹거나 자는 것도, 역시 짝짓기를 노출하는 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즉, 사람은 짝짓기할 만큼 가까운 상대가 아니고서는 같이 자거나,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현대인은 문란해!!!!!!!!!!!!

    +

    오른손이 잘 안 움직인다. 답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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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1월 29일 – 분해

    도무지 뭘 할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다.
    그 사실이 너무 분하고 부끄러워.

    어릴 적에나 하던 나쁜 생각이 다시 스물스물 떠오른다.
    왜 나는 남들만큼 건강하지 못할까?

    평범에 대한 미련은 제법 떨쳤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때면 늘 그래.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