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하루 나갔다 왔을 뿐인데, 이어폰이 사라졌다.
관능은 오래도록 인류에 기생해왔다. 이른바 삼대 욕구라고 하는 것 중에 성욕을 대리 충족하는 형태로 말이다.
당사자가 스스로 충족하는 것도 아닐진대, 사람은 본능에 따라 관음을 즐겨왔다.
인류에게서 동물적인 본성을 거세할 수라도 없는 한, 이런 욕구가 사라질 리는 없다.
한편 21세기에 와서 대두된 또 하나의 포르노가 있다.
먹방 말이다. 사람이 많이, 혹은 맛있게 먹는 것을 지켜볼 뿐인 형태의 영상물이다.
형태는 사뭇 다르나 해체해 보면, 그것이 관능과 별반 다를 것 없는 포르노의 일종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성욕이 아닌 식욕이라는 본능을 자극, 대리만족할 뿐이지만 말이다.
이런 순서대로라면 마지막에 나타날 것은 분명하다.
잠방이다.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고 있을 뿐인 영상을 찾아다니며 갈구할 것이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인간의 동물성을 혐오하는 나는 장시간 그에 대해 고찰해 왔다.
이것은 나의 가설이다.
생물이 가장 취약해지는 순간은 여지없이 번식의 순간이다.
수많은 동물이 최대한 짝짓기 시간을 단축해 온 것만 보아도 자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식사의 순간이다. 수면 시간은 빼놓으면 아쉽다.
이렇듯이 우리가 3대 욕구라고 부르며, 관음하려 하는 것은 모두 자연 상태의 동물에서 가장 취약한 순간이다.
거기서 나는 이런 추측을 내렸다.
즉, 사람은 여전히 동물적인 본능이 남아서, 다른 개체가 취약해지는 순간을 보며 정서적 안정감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내게는 꽤 그럴싸하게 느껴지는 추측이었다.
고로, 21세기는 포르노 아닌 포르노가 범람하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원리로 논리를 확장해, 나는 사람이 같은 공간에서 먹거나 자는 것도, 역시 짝짓기를 노출하는 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즉, 사람은 짝짓기할 만큼 가까운 상대가 아니고서는 같이 자거나,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현대인은 문란해!!!!!!!!!!!!
+
오른손이 잘 안 움직인다. 답답해.
도무지 뭘 할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다.
그 사실이 너무 분하고 부끄러워.
어릴 적에나 하던 나쁜 생각이 다시 스물스물 떠오른다.
왜 나는 남들만큼 건강하지 못할까?
평범에 대한 미련은 제법 떨쳤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때면 늘 그래.
부끄럽다.
연재 지연이 장기화 되면,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초기에는 빠르면 6시간, 평균 12시간에 1편씩 작성했으나, 요즘에는 최소 24시간에 늦어지면 끝도 없이 늘어지는 작업이 계속된다.
작업 중에는 잠도 제대로 잘 수 없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몸이 멋대로 일찍 일어나 버린다. 날이 어두운 걸 보고 놀라며 깨어 시간을 보면 서너 시간쯤 지나 있다.
기상 후에는 세수만 급하게 하고 자리에 앉아서 작업을 시작한다. 커피는 조금 정신이 몽롱해질 때쯤 전날 따라놓은 물을 끓여 마신다. 생수를 쓰자니 돈이 아깝고, 공용 정수기는 멀리 있어서 물을 따르러 가는 시간이 아깝기 때문이다.
끝이 언젠지 모를 작업 속에서 나 자신을 독촉하기 위한 수단으로 일정 공지 등을 작성해보나, 최근에는 지킨 기억이 별로 없다. 마음만 쓰이고 독자에게 거짓말만 하는 셈이라, 이제는 잘 안하고 있다.
그래도 잘 쓰일 때는 기분이 좋지만, 그러지 않은 때는 온갖 비관적인 생각이 찾아든다. 티내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가끔씩 분출하는 감정이 인터넷에 하나씩 기록으로 남는다. 정신을 수습하고 지우는 건 내 몫이다. 안 그래도 바쁜데 과거의 나는 허튼 일만 늘리는 귀찮은 녀석이다.
이러다 보니 연재 시작 후 눈에 띄게 나빠진 것은 역시 건강이다. 잘 움직이지 않다 보니 근육이 약해져서, 조금만 걸어도 탈진이 찾아와서 글을 쓰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운동량을 줄이고, 체력이 줄어드니 작업이 밀리는 악순환이 완성되었다.
시력도 크게 나빠졌다. 이는 작업도 작업이지만 내 잘못도 있는데, 역시 어두운 곳에서 잘 써진다는 이유로 불을 꺼놓고 작업하는 일이 많아서 그렇다. 여기저기 부딪히는 일이 늘어난 뒤로, 불을 끄더라도 작은 조명 하나는 켜놓는 경우가 늘었다. (하지만 이건 원래 그랬기 때문에, 시력이랑 별 상관없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고.)
외모에 대한 걱정은 사치다. 관리는 세수 후 로션, 크림 끝. 아무리 그래도 얼굴이 창백해졌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서, 어쩌다 나갈 때는 미백 크림을 발라서 해결한다.
어쨌거나 고생 끝에 완성하면 기분이 좋다.
그러면 마침내 쉬는 시간이 생긴다. 일이 밀린 상황이라는 죄책감도 속내 있지만, 어쨌거나 기분이 좋아서 무마된다. 가볍게 운동을 하거나, 책을 읽다가 역시 내일 쓸 것을 생각해서 잠자리에 든다.
다만, 이러고 자면은 거의 하루내리 잠드는데, 내일도 올릴게요, 라고 자신만만하게 약속해놓고 못 올리는 경우는 대게 깨어나질 못해서 그렇다. 그런 약속도 안 해야는데, 아무래도 작업 완료 후의 고양감 때문인지 매번 내일이면 바로 한 편 완성할 것 같아, 라는 허튼 망상을 버릴 수가 없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싫지는 않지만, 이래서야 역시 금방 죽지 않겠어? 그런 생각 때문에, 빨리 완결을 내고, 평범한 직업을 가져서 건강 관리를 하며, 다음 작품을 위한 저금을 하고 싶다. 이번 경험을 통해서 돈 없는 작가는 불쌍하다는 걸 깨달았으니, 다음에야말로 돈 걱정 없이 내 페이스대로 글을 쓰는 우아한 작가를 체험해보고 싶다.
이렇게 고생을 해도 글을 쓰는 삶이란 건 역시 멋져서, 다른 삶은 그다지 끌리지가 않는 법이다.
나는 수많은 밤을 고흐와 지새웠다.
덕분에 뭇 호사가들이 묻곤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안다.
평범한 예술가로서 인정받는 삶을 사는 것과, 불운한 예술가로서 불후의 걸작을 남기는 것.
둘 중에 무엇이 나은 삶인가 하는 질문 말이다.
고흐의 대답은 분명 이렇다.
물을 것도 없이 평범한 예술가의 삶을 살겠노라고.
나는 그의 현명한 답변을 존경한다.
영원에 이른 그의 천재성이 아닌 그의 인내력에 찬사를 보낸다.
순간은 고통이다.
가는 길에는 어둠만이 가득하다.
세간은 그가 괴로움을 참지 못하고 자살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무지한 자의 오해다.
이러한 풍경을 8년이나 견딘 그는 신화 속 영웅에 빗댈 만하다.
나는 고흐를 존경한다.
그와 같은 길을 걷지만, 나는 이제 한계에 봉착했다.
글로 먹고 살 재능이 없다는 건 명백하다.
심지어 내게는 그처럼 그만이 그릴 수 있는 것에 대한 열정조차 없다.
밤이여, 들어라. 이 비참한 연명을 멈춰다오.
아니면 글이라도 못 쓰게 손가락이라도 잘라다오.
가다, 行く, go.
공교롭게도 세 언어 모두 변화를 나타내는 진행형에, 출발, 이동의 의미를 가진 동사를 사용한다.
내 경험상 이런 경우 높은 확률로 번역 과정에서 생긴 언어의 변화였다.
불어와 독일어 사전에서 go mad와 일치하는 표현을 찾은 바, 각기 devenir와 werden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두 단어에는 go처럼 복합적인 의미는 없이, 변화에 치중한 ‘되다’의 의미만 강조되어 있다.
그렇다면 유럽에서 go의 변형이 변화까지 전담하는 일은 흔치 않은 경우일까.
영어는 여러모로 타 라틴계 언어에 비해 독립성이 강하니까?
그러면 영어->일어->한국어 순으로 영향을 미친 걸까.
혹은 일어->영어, 한국어?
한국어에서 시작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 한국은 20세기 내리 과학과 문학에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으니, 국제 언어사에 영향을 미치기 어려운 환경이었으니.
이런 거 하고 있을 때가 아닌데!
좋아하는 작가님에게 쪽지를 받았다.
안에는 나를 유명한 작가님이라고 수식한 문장이 있었다.
뭔가 이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청난 괴리감, 소설로 치자면 좋은 도입부가 아닐까.
나는 달리 유명하지도 않고, 심지어는 능력도 출중하지 않다.
정말 이상한 일.
답장을 어떻게 보내야 하지?
유명한 사람처럼 답장을 보내면 이상할 것 아니야.
정말 이상해라.
사과 주스를 쏟았다.
컵에 담지 못했으니 엎지른 것보다는 쏟은 게 맞다.
닦는 동안 굉장히 서운했다.
손을 닦으며 거울을 보니 얼굴이 빨갰다.
아마 추워서 그렇겠지.
그뿐인 하루.
잠에서 깨어나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엔 무서워서 울고 말았다.
한동안 희미했던 죽음에 대한 공포가 급작스럽게 돌아온 것이다.
말하기도 새삼스러운 것이지만, 죽음 이후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아와 인식은 결국 뇌와 척추를 통한 전기 자극과 그에 따른 신호일 뿐, 한 번 망가지면 돌이킬 방도가 없다.
사후세계도, 소생도 없다.
죽음에는 어떠한 의미도 없는 것이다.
간신히 다가오는 수명에 담대해졌건만, 이래서는 전부 도로묵이다.
갈망과 공포, 죽음이 가진 양면성에는 도무지 적응하질 못하겠다.
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