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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산

    “은하씨는 자세가 안좋네.”

    갑자기 매니저가 말했다. 유니폼을 갈아입고 집에 가려던 은하는 어정쩡한 자세로 멈춰선 채로 그를 돌아봤다. 가는 것도, 멈춘 것도 아닌 그녀의 모습에도 아랑곳 않고 매니저는 혼자 말을 이어나갔다. 그녀가 듣고 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두 손을 배꼽 위로 포개 얹었다.

    “봐요. 인사는 이렇게 하는 건데.”

    그리고 그 두 손을 그대로 올려 복부도 가슴도 아닌, 가슴뼈 사이에 위치한 이름 없는 그곳에 올렸다. 차라리 심장에 가까워 보였다.

    “은하씨는 이렇게 하잖아.”

    그가 허리를 숙였다. 꼭 아픈 사람 같았다.

    “봐요. 은하씨. 인사는 얼굴이에요.”

    매니저는 무언가 불편한 이야기를 해야 하면 꼭 이렇게 말했다. 봐요. 봐요, 은하씨, 화장이 너무 진하지 않아요? 봐요, 은하씨. 굽이 너무 높지 않아요? 이런 식이었다. 무엇을 보라고 하는 걸까. 은하는 그의 말버릇이 어디서 나왔는지 궁금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에 최대한 미안한 표정을 지은 채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시늉을 한 것이다. 은하는 그럴 때마다 자신이 언제까지 이 일을 이어나갈 수 있을지 속으로 점쳐보았다.

    처음에는 3년을 생각했다. 그 정도 일하면 다른 정말 가치 있는 일을 준비할 시간을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그 시간은 곧 2년으로 줄었다가, 1년까지 줄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아득히 멀게 느껴져 아연 해지곤 했다. 결국 그 각오는 ‘여름휴가까지만’이 되었다, ‘추석까지만’이 되었다, ‘올해까지만’이 되더니 지지부진하게 2년이 흘렀다. 이제는 정말 목표했던 3년이 눈앞으로 다가오니 그만둘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봐요, 은하씨, 얼굴이 멀쩡하면 인사도 잘해야죠.

    은하는 뒷문을 통해 호텔을 빠져나왔다. 호텔 벽면을 바라보니 금색으로 도금된 國際라는 글자가 가로등 불빛을 받아 번쩍였다. 그 아래로는 The International이라는 영문자가 주석처럼 새겨져 있었다. 은하는 그것이 촌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은하와는 다른 문화권을 공유하는 외국에서 온 손님들은 그것이 멋지다고 생각하는지, 은하는 종종 그곳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손님들을 볼 수 있었다. 심지어 필요 없어 보이는 그 주석마저 나름 의미가 있었는지, 은하는 종종 손님들의 대화 사이에서 “international hotel”이라는 단어를 잡아내곤 했다. 그런 문화권의 손님들과는 ‘밟지 말아주세요. 잔디가 아파해요.’라는 표지판도 공유할 수 없었는지, 도금된 금색 문자 앞만 흙바닥이 휑하니 드러나 유독 흉물스러웠다. 은하는 이곳을 지나칠 때마다 저 도금된 문자가 누구의 노력으로 매일 저렇게 번쩍일 수 있는지 궁금했지만, 야간에 근무가 끝나는 그녀는 알 도리가 없었다.

    은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너무 노력한 나머지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은하는 배 언저리에 손을 가져갔다. 그렇지만 아무리 해봐도 손은 배로부터 조금 떨어진 허공 위를 맴돌았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헤집는 느낌이 들어 도무지 손을 내려놓지 못했다. 토할 것 같았다. 은하는 그 원인을 알았다. 잊으려고 해도 그러지 못했다. 봐요, 은하씨. 사람은 넘어지면 일어날 줄을 알아야 해. 언제까지 넘어져 있으면 그 사람은 도태돼요. 들은 적 없는 이야기가 낯익은 목소리로 귓전을 헤맸다.

    불빛 하나 없는 밤이었다. 가로등이 없는 길인 것은 알았지만, 원래 이렇게 어두웠던가. 달빛 하나 내리지 않았다. 오늘이 며칠이더라, 삭월인가? 아니면 구름이라도 낀 걸까? 은하는 잠깐 생각해 봤지만 잘 떠오르지 않았다. 은하의 안에서 시간은 유동적이었다. 언제는 10일이었다가, 언제는 1일이 되는 그런 식이었다. 알아낼 방도가 없었다. 그렇지만 은하는 이 어두운 퇴근길만큼은 좋아했다. 사람 없는 길거리는 을씨년스럽기보다는 자신만을 위해 준비된 레드카펫처럼 느껴졌고, 거리를 떠도는 취객과 세상의 저변에 깔린 영혼들은 그녀와 철저히 무관했다. 그들은 그녀에 대해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간혹 맞닿는 살갗에서는 온기를 느낄 수 없었다. 은하는 그 거리감을 좋아했다. 세상과 자신이 동떨어져 있는 그 느낌을 좋아했다.

    은하는 그날을 잊으려고 했다. 그렇지만 완전히 망각의 영역으로 집어넣었다고 믿는 그 순간 아무런 전조 없이 되돌아와 그녀를 짓눌렀다. 그럴 때마다 유독 몸이 무거웠다. 유독 배가 무서울 정도로 당겨왔다. 은하는 무심코 두 손으로 배를 움켜쥐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장이 쏟아져 내릴 거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도무지 잡을 수 없던 배가 그럴 때면 잘도 잡혔고, 은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허무감에 몸을 떨었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무언가 중요한 것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시간이란 뜰채 같았다. 온갖 소중한 것들은 흘려보내고, 오로지 거품 같은 찌꺼기만을 남겼다. 그런 식으로 멍하니 상념하고 있자면 머지않아 흐리멍덩한 삶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갑자기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이라기보다는 영유아의 그것에 가까운, 매숨마다 생명을 짜내는 듯한 절박한 그 소리에 은하는 놀라서 깨어났다. 은하는 그제야 자신이 전철에서 잠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피곤했던 게 틀림없다. 은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넓은 지하철 칸에 자신 혼자 앉아 있었다. 자신을 깨운 울음소리는 온데간데없었다. 은하는 서둘러 창 밖을 내다보았다. 창 밖에는 모노톤으로 잠식된 논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저 너머로는 산이라기보다는 삼각형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검은 덩어리들이 흐릿하게 비춰 보였다. 너무 오래 자 버린 것이 아닐까, 은하는 내려야 한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전철은 멈출 생각을 하질 않았다. 마치 이 세상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애기 엄마, 애기 엄마.”

    은하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분명히 아무도 없었던 노약자석에는 언제부터 앉아 있었는지 한 노파가 앉아 은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척 봐도 그녀의 어머니보다도 나이 든 노파는 무엇보다 시간과 싸우고 있는 것 같이 힘들어 보였다.

    “저 애기 엄마 아닌데요.”

    노파는 이상할 정도로 낯이 익었다. 은하는 어디선가 본 적이 있나 떠올려 봤으니 짐작 가는 부분이 없었다. 오히려 비교하자면, 자신이 늙으면 이런 모습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파는 당장 숨이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모습으로 헐떡이며 말을 이었다.

    “아이, 아이 놓고 갔어, 애기 엄마.”

    “그러니까, 저 애기 엄마 아니라니까요.”

    은하는 방금 전에 들었던 아기 울음소리가 떠올랐다. 환청이 아니었던 걸까. 그렇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아기가 보이는 일은 없었다. 왠지 기분 나빠졌다. 노파는 연신 “애기 엄마, 애기 엄마” 하고 되풀이할 뿐이었다. 빨리 전철에서 내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전철은 계속 끝을 알 수 없는 어딘가로 달려갈 뿐이었다.

    “그러니까, 저 아이 없다니까요!”

    은하는 자신이 지른 소리에 놀랐고, 그 내용에 다시 놀랐다. 되돌릴 수 없는 죄악을 저지른 것 같았다. 노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은하는 그 표정이 낯익었다.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어….”

    노파가 중얼거렸다. 은하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정말 그럴 리가 없었다. 뒤로 물러나던 은하의 등이 지하철 자동문과 맞닿았다. 은하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고 비명을 질렀다. 검은 차창에 비추는 것은 자신의 얼굴이었다. 그것은 놀라울 정도로 노파를 닮아 있었다. 노파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 엄마.”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은하는 핸드백을 들어 노파의 머리를 내리쳤다. 둔탁한 감각이 손끝에 퍼졌다. 사람이라기보다는 육편을 때리는 것 같았다. 은하는 쓰러진 노파를 계속해 내리쳤다.

    “난, 난 너 같은 자식 없어!”

    “엄마, 엄마!”

    노파의 목소리는 어느새 초로의 여성의 것이 되었고, 그 목소리는 곧 중년 여성이 되었다. 엄마, 엄마. 그러다가 은하와 비슷한 목소리가 되기도 했고, 성숙한 학생의 것이 되었다. 엄마, 엄마. 그러더니 다시 풋풋한 청소년의 목소리가 되었다가, 어린 소녀의 것이 되었다. 엄마, 어마. 이빨이 빠지기라도 한 듯이 그 발음이 점점 흐려졌다. 아기의 울음소리. 그 소리마저 점점 줄어들어 둔탁한 고기 때리는 소리만이 남았다. 육편이라기보다는 갈린 고기를 때리는 것 같았다.

    “왜 태어나지도 않았잖아… 나한테 왜 그래… 태어나지도 않았잖아….”

    형체가 남지 않은 붉은 덩어리를 은하는 계속해 내리쳤다. 내장의 파편. 태반. 태아. 육편.

    “은하씨.”

    “은하씨!”

    은하는 눈을 떴다. 매니저가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인사는 그렇게 하는 거지.”

    은하는 고개를 내렸다. 두 손이 배꼽 위에 곱게 포개져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써본 단편.

    너무 어수룩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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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가 내린 날

    “우주가 내릴 때는 꼭 우산을 써야 해.”

    소녀가 말했다.

    “우산.”

    “그래, 우산.”

    노란 우비를 쓴 소녀는 자신의 체구에 맞는 아담하고 귀여운 노란 우산 손잡이를 꽉 쥐었다.

    “그럴 필요는 없을걸. 여긴 실내니까. 비가 내려도 맞을 일 없어.”

    “비가 아니야. 우주가 내리는 거야.”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무심코 소녀의 시선 끝을 올려봤다. 막혀 있는 천장과, 걸려 있는 샹들리에의 불빛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샹들리에 위에는 조금 먼지가 쌓여 있었다.

    “나는 그것부터 이해가 안 되는데.”

    “곧 우주가 내릴 거야. 별과 어둠, 자외선이 흘러 내릴 거야. 장화를 신으면 좋겠지만, 없다면 뚫리지 않은 가죽 구두로 충분해.”

    “우주.”

    “그래, 우주.”

    나는 바닥을 내려 봤다. 소녀가 나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맨발은 좋지 않을걸.”

    “집이니까, 괜찮아.”

    “지붕은 의미가 없어. 우주는 사람의 마음에 내리니까.”

    “그러면 우산도 필요 없겠지.”

    “우산은 하늘을 보는 걸 포기한다는 뜻이야. 그런 사람에게 우주는 내리지 않아.”

    “그러면 커튼을 칠까?”

    소녀는 살짝 고개를 숙이곤 아랫입술에 검지 둘째 마디를 댔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샹들리에 위에 쌓인 먼지가 신경 쓰였다.

    “역시 우산이 안전해. 곧 우주가 내릴 거야.”

    “너는 그걸 어떻게 아는데?”

    “하늘이 흐리니까.”

    “지금은 밤이야.”

    “별들이 점멸하고 있어. 이런 날에는 우주가 내려.”

    나는 창 밖을 내다봤다. 자색 하늘이 별의 수로를 따라 은은히 흐르고 있었다. 어둠과 자외선의 물결 위에 얹어진 별들은 우주에 가라앉았다가 떠올랐다를 반복하며 둥둥 떠다녔다. 우주의 뒤로 자홍색 구름이 뿌옇게 흘렀다.

    “혹시 저걸 말하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니야.”

    “난 저런 하늘을 본 적이 없는데.”

    “우주가 내리기 시작했으니까. 너에게도 하늘이 보이기 시작한 거야. 지금이라도 우산을 쓰도록 해. 커튼도 치고.”

    “잠깐만, 조금만 더 보고.”

    우주는 한 줄기씩 방향을 꺾어 아래로 내려 흘렀다. 유리창의 표면을 기는 물방울 같았다. 자홍색 구름의 눈이 흐르는 우주를 따라 주르륵 미끄러졌다. 차분한 심장 아래로 축축히 젖은 마음이 거세게 뛰었다.

    “우주에 젖었구나. 우산을 쓰도록 해.”

    소녀는 검푸른 우산을 내밀었다. 그 위로는 하얀 고래 한 마리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잡았다.

    “우주.”

    “그래, 우주.”

    “우주 위에는 뭐가 있지?”

    “하늘 위에는 구름이 있지. 우주 위에는 별이 있고.”

    “그러면 뒤에는?”

    소녀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나는 우산을 폈다. 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창문에는 달만이 교교히 비쳤다. 하얀 먼지가 반짝이며 공기 중을 떠돌았다. 우선은 책장을 치워야겠어, 나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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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옆집사는 생쥐가 죽었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 썩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친하게 알고 지내던 것은 아니지만, 멀리서 발치만 엿보아도 의젓한 미물이로구나, 하고 흠모해 왔던 것이다. 비록 모진 세상의 풍파로 때 묻어 거뭇거뭇 회색 빛이 감돌지만 감출 수 없는 귀티가 흐르는 은빛 털과 위세 좋은 발걸음처럼 우뚝 솟은 꼬랑지는 보기 꽤 좋았던 것이었다. 일찍부터 이런 자그마한 가정집에 붙어있기는 아깝다고 생각해 왔거늘, 그 뜻을 피우기 전에 저물어 버린 것은 유감 천만 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조촐하게 상이라도 차려주는 것이 어떨까 싶었지만 제집도 아니고 옆집에 사는 생쥐를 위해 거기까지 해주는 것은 어떤가 하여 단념하였다. 향 대신이라 하기는 뭐하지만 담뱃불 하나 붙어 고이 보내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생쥐라 하면 꽤나 대가족일 것이다. 그 풍채를 보아 암컷 한 둘 쯤은 거느리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니 부양할 가족도 그만큼은 있었을 것이다. 유가족들은 잘 지낼 수 있을까, 옆집 주인이 보지 않는 사이에 체다 치즈 한 점이라도 잘라 문 앞에 모른 척 놓아둬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낭군께서는 의로운 상을 당하셨다고 위로라도 해줘야 함이 사람된 도리가 아닐까. 너 떠난 날부터 내 마음이 편하지 않아, 식사하다가도 목이 막히고 자다가도 편치 않아 새우등을 굽히니, 책임지라고 하고 싶어도 그 말을 들을 자가 없구나. 아, 생쥐여, 내가 너없이 어찌 살 수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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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병 外

    열병

    지독한 열병이었다. 온몸을 관통하는 영감이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켰고, 끓어오른 피가 춤추며 떠올라 붉은 안개구름이 되어, 이윽고 아스팔트 위에 말라붙은 개구리처럼 수분기 하나 없는 시체가 되는 그런 열병이었다. 달빛은 태양만큼 밝았고, 어느 때는 낮인 것 같았고 어느 때는 밤인 것 같았다. 두 눈은 진작에 멀었거늘 파리의 겹눈처럼 열기만을 보고 이해했다. 그것은 영감이었다. 또한 끊임없는 마찰이었다. 파에톤의 태양 마차가 나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비참한 한 마리의 개구리였다. 여름날 아스팔트 위에 얹어진 비극적인 흉물이었다.

    그 날도 여름이었다. 비가 내리지 않아 온 세상의 수분이 말라붙은 그런 여름날이었다. 눈물샘이 말라붙어 누구 하나 울 수도 없는 그런 뜨거운 날, 차창 너머에 비친 그것은 비극조차 되지 못한 그저 흉물이었다. 개구리였다. 피 한 방울도 가지지 못한 채, 도로 위에 녹아내려 아스팔트와 하나가 된 비극의 덩어리였다. 나의 눈꺼풀이 녹아내려 두 눈이 달라붙은 모습과 꼭 닮았다. 달은 너무나도 뜨거웠고, 필경 태양과 같았다. 개구리였던 비극이 있던 장소에는 붉은 뭉게구름만이 둥둥 떠다녔다. 본디 내 것이었던 그것이었다. 너무 차가운 나머지, 내가 가진 겹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분명히 나의 것이던 그것이었다. 나는 울지도 못했다.

    비가 오지 않았다. 하늘도 우는 법을 잊었고, 나 역시 그러했다. 살얼음이 피어오른 차창 너머로 나는 나의 모습을 본다. 피 한 방울 가지지 못한, 두 눈마저 말라붙은 비참한 모습으로 나는 거기 있다. 그런 꼴로는 개굴개굴 울 법도 한데, 눈물샘마저 말라붙었는지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아, 그 여름은 유독 조용하더랬다.

    임종의 순간이 다가온다. 해는 지고, 달만 덩그러니 떠있다. 불빛에 매료된 수천 마리의 초파리들이 저 하늘 높이 올라가 이카로스와 같은 결말을 맞는다. 수천 개의 붉음이 쏟아지는 모습에 매료되어 나 역시 허공으로 한 발을 내딛는다. 붉음을 가지지 못한 나이기에 그저 검고 흉물스러운 덩어리가 떨어진다. 마른 가죽, 피 한 방울 없는 개구리가 아스팔트에 넓게 퍼진다. 하늘에는 그저 뜨거운 것이 무심히 올라가 있다. 그것이 해인지 달인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심애

    나는 실패작이다. 눈도 귀도 코도 입도 손가락도 제 위치에 제 개수 붙어있음에도 그렇다. 검은 핏방울이 꿀럭이며 목 위아래를 오간다. 사람을 살리지 못하는 죽은 피다. 뱉지 않으면 질식해 죽는다. 그것이 나다. 아무리 생각해도 붉은 것이 부족하다.

    나는 조용히, 격렬히 호흡한다. 매 숨이 마지막인 것처럼 헐떡거리며 살아있는 것을 버거워한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나아 보여 목을 조르면 그것이 무섭다고 손을 떼어 놓는다. 살지도 죽지도 못한 채로 그 경계선만을 오간다.

    생명의 근원은 핏줄 속을 분주히 오가는 타인의 노랫소리다. 그것은 내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그러다가도 곧 질투가 나 허연 가죽을 찢고 핏줄을 끊어 모두 흩트려 놓는다. 그 자리에 남는 것이 검은 피뿐이 없어질 때까지 그리한다.

    밤이 오면 나는 없어진다. 어두워지면 검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나조차 나를 찾을 수 없어진다.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너무나도 무서워져, 그래서 추하게 운다. 그 흔적을 따라갈 수 있게, 차갑게 바닥을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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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면安眠

    처음 내가 너를 발견했을 때, 고백건데 나는 너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단다. 이런 어둑한 숲길이니 길을 잃는 것은 당연해 보였으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너의 어리석음에 한탄했지. 내가 혹시 너에게 과중한 부담을 맡긴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마저 들더구나. 그 때문에 네가 햇빛도 들지 않는 눅눅한 바닥에서 이끼의 먹이가 되고 있노라고 생각하면 나의 이런 반응도 과한 것은 아니겠지. 내가 너를 다시 찾아낸 것도 하늘이 도왔다고밖에 말하지 못할 거야. 나란들 네가 이런 숲 한가운데에 뒹굴고 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었겠니.

    다시 너를 만나게 되었을 때, 나는 그것이 너라는 것도 알아보지 못했단다. 당연한 일이었지. 내가 그것이 너라고 확신할 수 있었던 것도 고작해야 몇 가지 기억들 덕분이었어. 어머니에게 받았다고 말하며 언제나 차고 다니던 금이 그어진 낡은 손목 시계와, 밑창이 떨어지고도 못으로 직접 수선해 신고 다니던 소가죽 구두 따위의 사소한 것들 말이야. 그렇게 나는 네 유해 앞에서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 너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이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너는 참으로 아늑해 보이더구나. 이미 벌레들의 집이 되고, 이끼를 이불처럼 덮고 누운 네 유해의 모습에서 나는 그제서야 네가 네 자리를 찾았다고 생각하고 말았단다.

    나는 이제 이해한단다. 이 모든 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었던 거야. 너는 죽은 것도, 그렇다고 살아 있는 것도 아닌 채로 그 오랜 세월을 홀로 견뎌온 거야. 해가 뜨고 지는 저 순환 속에서도 감동을 느끼던 네 여린 감수성이, 하늘이 보이지 않는 이 어두운 숲 속으로 이끈 거야. 용암처럼 네 피부 안에서만 흐르던 피가 밖으로 솟아오른 그 작은 상처가 얼마나 큰 고통이었는지, 나는 몰랐던 거야.

    나는 너와 닮았기에 눈물로 슬퍼할 줄을 모른단다. 절제 없이 흐트러진 별들 속에서도, 해와 달의 순환 속에서도 너를 찾지 않는단다. 그저 하수도 밑에서 올라오는 어둡고 습한 바람 속에서, 누군가의 발에 밟힌 으깨진 개미의 파편 속에서, 나는 그곳에서 너를 만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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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이 비처럼 내린 날

    어떤 날은 별이 하루종일 쏟아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보통은 3~4시간 정도 쏟아지다 말았다. 처음에는 종말을 외치기도 하던 사람들은 빠르게도 담담해졌다. SNS와 동영상 사이트의 최상위권을 차지하던 별의 향연은 하늘을 올려다보면 언제든 볼 수 있는 흔한 것임을 알게 된 이후로 누구도 관심 주지 않았다. 그저 하늘보다 모니터를 보는 것이 편한 몇몇의 사람에게만 지속적인 수요가 있었다.

    누구도 그것들이 어디서 오는지 몰랐다. 바다 건너의 대단한 나라의 대단한 과학 기관에서는 정보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던가 하는 음모론 같은 것이 떠돌았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별들은 찰나에 내려왔다, 불타서 사라졌으니까.

    사람들은 그렇게 하늘에 관심을 잃었다. 우주는 가장 아름다운 속살을 너무 쉬이 보여줬기에 더이상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 속에 숨어 다가오던 분명한 실체를 누구도 깨닫지 못했다.

    별이 떨어진 것은 태평양 어느 바다라고 했다. 지금껏 없었던 거대한 쓰나미가 일본과 호주, 미국 서부를 강타했다. 하늘은 어두운 재와 불길로 가득했고, 오로지 저 너머에 흐릿한 별의 흐름만이 보였다. 바다는 끓기 시작했고, 그 여파는 지구 반대편에도 닿았다.

    사람들은 지구에 가망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결과, 과학 기관은 이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방법으로 대담한 탈출을 감행했다. 그들은 이것을 통과하면 지구가 안전하던 과거로 갈 수 있다고 설명하며, 반드시 과거의 지구에 이 재앙을 경고할 것을 당부했다.

    더이상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은 그것을 향해 몸을 던졌다. 지금은 볼 수 없게 된 푸른 지구를 본 사람들은 환호하며,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 높지 않은가.

    어떤 날은 별이 하루종일 쏟아지기도 했다.

    5분 만에 써낸 날 것.

    역시 이런 게 좋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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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완성 단편 (풀무)

    평생 철을 만져온 영식은 다른 일을 몰랐다. 언제는 철판을 밀기도 했고, 언제는 철봉을 깎기도 했지만 그 본질은 언제나 철이었다. 그저 우직함만이 미덕인 줄 알고 35년간 철을 밀고 닦았다. 어느새 고통보다 익숙한 것이 된 철판의 열기와 무게가 그의 세월을 증명해 주었다. 한 때 뜨겁게 타올랐던 정열은 그저 안으로 삭아 영식의 내면에서 끓었다. 자신은 아직 식지 않았다고 영식은 생각했다. 가슴 어딘가에 있는 풀무가 뜨겁게 달아올라 있다고, 그리 생각할 때마다 영식은 타오르는 감각을 느꼈다. 그는 자신을 두드리는 고행자였고, 그때마다 단단하고 순수한 것이 되었다. 철을 다루는 그의 모습에는 경건함마저 묻어났다. 영식은 용광로였다. 불순물을 녹여내 오롯이 순수한 것만이 표면에 떠올랐다. 그런 만큼 그의 얼굴은 단단해 졌는지 모른다. 영식에게 안면마비가 찾아온 것은 작년 겨울이었다.

    영식은 표정이 없는 사람이었다. 참는 것만이 좋은 것이라 배워온 어른이라 그런지 언제나 눈살을 모으고 살짝 눈썹을 치켜올리는 것으로 모든 감정을 표현하곤 했다. 주둥이가 못난 저어새 같았다. 술이 들어가도 얼굴만 붉어지고 말았다. 술을 담는 부대가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계속 붉게 붉게 물들 뿐이었다. 기뻐도 마셨고 슬퍼도 마셨다. 그런 우직함이 시시한 것이었는지 그는 언제나 혼자 마셨다. 그래도 영식은 괘념치 않았다. 뜨겁게 달군 쇠는 물로 식혀야 하는 것을 알았기에 그는 자신의 풀무에 찬 술을 보냈다.

    신세지고 있는 사장님으로부터 혼사가 들어온 것은 마흔을 넘길 무렵이었다. 전등이 어두운 공장 구석에 처박혀 모든 젊음과 열정을 불태운 그였기에 여자를 아는 일도 없었고 그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며 늙은 사장은 난생처음 보는 이름의 여성을 소개해 주었다. 응우옌, 처음 발음하는 그 울림은 이상할 정도로 낯익어 수차례나 입에서 다시 튕겨보게 되는 것이었다. 아는 사람에게 소개받은 만큼 믿을 수 있었고 달리 피할 이유가 없었기에 영식은 그날부터 아는 것이라고는 이름밖에 없는 그 여인과 동거하게 되었다. 혼인 신고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와서는 그것이 진짜 이름인지 알 수도 없었다.

    영식은 철을 때렸다. 때리는 만큼 손도 철도 단단해졌다. 세상은 그렇듯이 정직한 것이다. 고통 없는 성장은 없고 성숙한 만큼 다치는 법이다. 응우옌, 한국어라고는 남들의 반의반만큼도 하지 못하는 그 어린 30대 여성이 영식의 가슴 한 켠을 차지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잘하지도 못하는 한국말 중에 그것을 제일 잘한다는 듯이 항상 “영식, 영식.” 하며 졸졸 따라다니는 그녀는 그와 달리 참 웃기도 잘 웃었고 울기도 잘 울었다. 그녀가 울 때마다 영식도 아팠다. 그것은 불완전함이었고, 연약함이었으며, 온기가 있는 부드러운 살갗이었다. 살을 맞댈 때마다 영식은 속 안에 차오르는 죄악감에 술을 마셨다. 어느새 가득 쌓인 불순물을 가라앉히고 차갑고 단단한 것만을 남기고자 그렇게 잠든 여인을 내버려두고 혼자 술을 마셨다. 누군가 말했던가, 예수의 옆구리에서 쏟아져 나온 피에서는 진한 알코올 향이 흘렀노라고. 종이컵에 담긴 것은 성혈이었다. 두 모금 남짓한 차갑고 쓴 성혈이 풀무를 붉게 태웠다. 밤을 완전히 몰아낼 때까지 그렇게 불태운 것이다.

    가장 순수한 것만 골라낸 철도 언젠가는 녹스는 법이다. 저 외국의 고명한 학자, 켈빈이라는 자가 그리 말했다 하지 않나, 불변이란 없는 법임을, 모든 열은 사그라지는 법이 없다는 것을. 영식은 언젠가 그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고등학교의 문턱조차 밟아본 적 없는 그였지만 이미 가장 심오한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찬 술이 쏟아질 때마다 도리어 속에서는 무언가 뜨거운 것이 치솟고 있음을, 어떤 비극도 인간의 사랑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언제나 알고 있었다! 그는 고행자인 동시에 수사였다. 여성도 모르는 그는 언제나 사랑의 장인이었던 것이다.

    영식은 응우옌과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의 미숙한 한국어 실력 때문도, 그에 못지않게 무뚝뚝한 영식의 성격 때문도 아니었다. 영식은 자신의 가장 연약한 살로 그녀를 품었다. 언어 이상의 고상한 표현 방식이 그들에게는 있었다. 밤이면 천장에 무수한 나비가 흩어졌다가 하나로 뭉쳤다 반복하며 춤을 추었고, 저 천장의, 저 하늘의, 저 우주가 보여주는 황홀경 속에 항상 홀로 술을 부었다. 어둠 속에서 솟아오른 나비들은 그 빛나는 풀무 속에 제 몸을 던져 불살랐다. 마치 죽기 위해 태어난 것 같았다. 영식은 항상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레 기억을 잃었다. 그는 술에 지는 법이 없었고, 불길은 그저 거세질 뿐이었다.

    그냥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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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완성 단편 (심리 상담)

    “요즘은 어디에나 기계가 있잖아요?”
    “그렇죠. 아주 편한 세상이 됐죠.”
    “아니, 제가 하고픈 말은, 그런 게 아니라….”

    여자는 손을 모으고 두 엄지를 마주 비볐다. 그녀 자신은 자각하지 못했지만, 신중히 말을 고를 때 언제나 그랬다.

    “정말 어디든 있잖아요? 편의점이나, 식당이나, 심지어 회사에도….”

    입과 목청을 함께 닫고, 그녀는 고개를 살짝 내리깔았다. 그리고 동공만 살짝 위로 올리며 눈치를 살폈다. 이것도 그녀의 낡은 습관 중 하나였다. 지나간 시대의 미덕들은 여전히 흔적기관처럼 그녀의 행동 곳곳에 남아 있었다.

    남자는 눈살을 구겼다.

    “기계가 있는 게 싫다고요?”
    “아니, 아니요! 제 말은 그게 아니라!”

    그녀는 황급히 부정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뭐든지 좋아요.”

    남자는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치 볼 필요 없어요. 생각나는 대로 마음에 있는 말을 전부 꺼내보세요. 여기서는 아무도 이상하게 안 봐요.”

    그는 턱을 괴며 살짝 앞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제 말은….”

    여자는 한참 숨을 삼키고는 힘겹게 한 마디 한 마디를 토해냈다.

    “심리 상담까지 기계가 하는 건 좀 어떨까 하고….”

    그렇게 그녀는 눈앞의 상담형 모델의 눈치를 살피며, 꼭 파리 새끼처럼 손가락을 비벼댔다.

    날 것의 아이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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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완성 단편 (민)

    민, 처음 너와 만난 순간을 기억해. 그것은 내 머릿 속에서 몇 번이나 회오리 치며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기억이기에, 민, 나는 너를 보다 특별히 여겼단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몸에 맞지 않는 헐렁한 양복을 차려입고 빵모자를 푸욱 눌러 쓴 단정함일까, 아니면 네가 들어오는 순간 화악 하고 퍼져나간 소독약 냄새일까. 그것이 무엇이건 나는 너와 처음 만난 순간부터, 너의 살짝 내려간 한 쪽 입꼬리와 반쯤 닫힌 음울한 얼굴을 잊을 수 없게 되었단다. 너의 불행의 주박은 다른 사람마저 끌어들이는 것이란다, 민. 그렇다고 내가 너를 탓할 생각은 없단다. 민, 너는 네가 짐을 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믿지 못하고 더 많은 짐을 지려는 그런 아이였단다.

    “부모님이 죽었어요.”

    당돌하게 너는 그런 얘기를 했단다, 민. 네 부모님 양 쪽 모두를 알고 있는 나에게는 꽤나 영문 모를 말이었던 것이지. 나는 그것이 네가 만들어낸 거짓말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단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서 만들어낸 아우성 같은 것이라고, 그렇게 나는 너에 대해 알기 시작했단다. 나는 너를 달래야 할지 고민했지만, 그저 내 본분을 따르기로 선택했단다. 너를 앉히고 종이컵에 따라진 커피를 내주며 너에게 필요한 절차를 알려주거나 하는 것 따위의 일 말이다. 그래서는 안됐었는데. 그런 말은 해서 안된다고 너를 다그치거나, 천천히 너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째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그렇게 물었어야 했었는데.

    민, 그 날 밤은 길었단다. 너에게도 나에게도 그랬을 것이지. 너는 종이컵을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듯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잡은 채, 하염없는 침묵으로 시간을 흘려 보냈고, 나 역시 의미없는 웅성거림으로 너를 대했기에 우리 둘의 시간은 유독 길었을 거야. 그러나 민, 변명을 해보자면 나는 네가 무언가 말하기를 기다린 게야. 울거나 변명을 늘어놓거나, 끝도 없는 거짓말을 이어가기를, 나는 그렇게 기다리고 있었지만 너는 그저 “감사합니다” 한 마디를 하고는 굳게 입을 다물었지.

    그 짧은 밤이 지나고 해가 뜨자 너는 감사와 작별을 고하고 그렇게 사라졌지. 그곳이 제자리가 아니란 것을 아는 저녁 비마냥 그렇게. 그렇지만 민, 네 빈자리는 아주 느리게 차더구나. 젖은 땅과 뿌연 물안개가 희미하게 네가 그 곳에 있었음을 그렇게 호소하더구나. 새벽 내내 함께 있었기 때문일까, 나는 아직도 네가 그 의자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아 침통한 눈으로 내 쪽을 막연히 응시하고 있는 것처럼 그 시선을 느꼈단다. 정말로 평범한 일은 아니었던 셈이지.

    민, 너는 모르겠지만, 그날 나는 편지를 썼단다. 반쯤 잠에 취한 채로 허깨비마냥 의미 없는 길고 긴 문자를 나열해, 결국은 누구에게 어떻게 보내야 할지도 몰라 그대로 접어 다시는 쳐다보지 않을 구석진 책장 위에 올려놓았지. 민, 그날 나는 악몽을 꿨단다. 그것은 분명 너의 탓이었어.

    너는 그런 아이였지. 민, 네가 떠난 뒤에 나는 어디서나 너의 존재를 느꼈단다. 그저 희미하여 잘 보지 않으면 그것이 너라는 것도 모를 정도였지만 분명 그것은 너였어. 나의 일상 속을 떠도는 네 자취는 오후의 라디오 속에서도, 싱크대 위의 찻잔 속에서도 간혹 나타나 나를 놀랍도록 우울하게 만들곤 했단다. 민, 너는 그렇게 먼지 같이 하얀 아이였어. 그럼에도 너를 잊고자 하는 노력은 마치 죄악처럼 느껴져 나는 그것을 감내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단다.

    우리가 다시 만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어. 기억하니? 우리가 처음 만난 그 날처럼, 굳게 닫힌 창문 틈 사이로 가을바람의 한기가 새어 나와 피부 사이사이로 파고들던 그날을. 한심한 일이지만, 나는 네가 다시 나를 찾아 왔을 때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단다. 분명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현실이 된 확신의 무게 앞에서 나는 어쩔 줄 몰라 하였던 거야. 그것은 너도 같아 보였단다, 민. 우리는 말 하지 않음으로써 서로의 공통점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게야.

    그냥 최대한 예쁜 문장으로만 별 생각 없이 꾸며보고 싶어서 썼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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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돋아나는 이빨, 변화

    세 번째 이빨은 우화의 증거다.

    인간이되 인간이 아니게 된 증거이다.

    이빨이 여러 번 자랄 수록 인간에서 멀어진 것으로 분류되며, 그 끝에는 이빨로 뒤덮인 얼굴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세 번째 이빨이 자랄 때부터 우화의 꿈을 꾸게 된다.

    쟝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만남을 기억했다. 그건 6살 무렵, 딱딱한 빵을 씹던 때였다. 빵을 물어 뜯다가 평소와 달리 혀 근처가 허전하고 입에 찬 바람이 든다는 걸 깨달은 쟝은 즉시 자신의 몸에 일어난 변화를 체감했다. 그 광경은 지금도 잊을 수 없었다.

    창밖의 바람이 불때마다 털지 않은 커튼에 쌓인 먼지가 방 안을 떠다니고, 정오 무렵의 햇살에 방바닥의 곰팡이가 선명하게 보이고, 물때와 케첩이 묻은 테이블과 낡은 의자, 거기 앉은 자신의 손에 들린 빵, 그리고 거기 박혀 있는 자신의 앞니. 이가 이르게 빠진 잇몸에서는 피가 흘렀지만 쟝은 그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넋이 나간 채로 이빨을 몇 번이고 햇빛에 비춰보았다. 그날부로 쟝은 당시 가장 아끼던 유리 구슬이 든 병을 비우고, 그 안에 자신의 앞니를 소중하게 담아 놓았다.

    그리고 같은 날 밤, 쟝은 부모님 몰래 실과 망치를 방에 가지고 들어가, 자신의 남은 이빨을 모두 뽑아버렸다. 통증과 출혈로 어지러웠지만, 그의 병 안에는 피 묻은 19개의 유치가 전리품으로 들어 있었다. 너무 빨리 이빨을 뽑은 탓에 음식을 씹을 수 없었고, 쟝은 거의 굶어 죽을 뻔했지만 빠르게 자란 앞니로 빵을 씹어서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때 이후로 살이 붙질 않아서 살집이 있는 편이었던 쟝은 길가의 거지조차 손을 내밀지 않을 만큼 말라붙었다. 그것이 그가 기억하는 첫 번째 변화였다.

    하지만 병을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이빨은 지금보다 수십 배는 더 필요했다.

    세계관을 잡기 위해 쓰다가 만 것